늙어 가는 아내에게 -황 지 우-

2024. 3. 10. 00:13블로그 에세이/좋은시

늙어 가는 아내에게

                                                         -황 지 우-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곱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 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 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 주었지
그런거야, 서로를 오래 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 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아이신을
한 알 한 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변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것은 비어있느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 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힌 손으로 집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 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