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2. 6. 00:29ㆍ블로그 에세이/낙 서
미싱이 도착 했다..
유튜브에서 어떤 젊은아빠가 아이들 옷을 만들어 주는걸 우연히 보고는 막연하게
나도 해볼까.. 하는 마음에 그날로 온라인 주문을 하고 무작정 사놓고 보니 미싱을
할줄 아는것도 아닌데 내가 무엇에 홀려서 왜 이걸 샀는지 어이가 없어졌다..ㅋ
박스를 뜯어내고 미싱을 꺼내보자 어찌해야 할지 멘붕이 오기전에 문득
추억이 먼저 왔다..
아주 어렸던 그때..
엄마의 빨간 재봉틀이 떠올랐다..
학교를 파하고 뜀뛰기로 집에 도착해 대문을 열면 마루에서 재봉틀을 돌리던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가방을 던져놓고 엄마곁으로 다가가면 엄마의 머리위에 앉은 하얀 실밥이 눈에 띄였다..
"이것 마져 하고 밥먹자.." 하던 소리에 고개를 끄덕이고 가만히 엄마곁에 누우면
왠지 자장가 같았던 재봉틀 소리에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다..
설 이나 추석같은 명절에는 어김없이 새옷의 길이를 알맞게 맟추는 엄마의 행복한
재봉틀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설빔이나 한가위빔을 차려입고 나들이에 나서던 기억이 생생한데..
다행이도 삯바느질을 해서 살림에 도움을 더할 만큼 궁핍한 환경은 아니었던걸로
기억되어서 당시 세탁소나 옷수선집 같은건 흔치 않았던 때임을 감안한다면
엄마의 재봉질은 그저 우리 삼남매의 바짓단을 올리거나 소매자락을 줄이는
정도 였었을것이다..
발로 패달을 밟아 돌리는 엄마의 재봉틀 소리는 지금의 전기와 모터로 돌아가는
미싱의 소음과는 전혀 다른 소리였다..
패달을 밟을때 마다 털그럭 거리는 소리는 무엇보다도 엄마와 가장
가까웁게 닮아있는 정겨운 소리였다..
사용설명서를 보니 글씨도 깨알만 하고 무슨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레시피 DVD가 있어 컴 에 넣고 시청해보니 실끼우기..북알 감는법..메뉴에 의한
다이얼 조작법.. 노루발 탈부착법과 기본적인 바느질 방법등이
잘 그려져 있어 도움이 되었다..
재단용 가위와 줄자..쵸크..오버록 노루발..쪽가위..봉제사..등 자질구레한
미싱 부속품을 온라인 으로 구입해 미싱을 할수 있는 스텐바이에 들어갔다..
버려질만한 옷감으로 시간이 날때마다 연습을 한지 2개월 정도 지나고 보니
이젠 어느정도 손에 익기도 하고 제법 미싱질이 되어가는듯한 느낌이 든다..
지퍼가 달린 베개피 정도도 만들수 있고 옷수선집에 맡기면 몇천원은 들어갈
바짓단 줄이기 정도는 내가 직접 줄여 입을수 있으니 경제적 이익도 얻을수 있다..
남자가 무슨 미싱질 이냐고 흉보기도 할지 모르지만 남에게 피해주는일도 아니니
내가 만족하면 되는일 아닌가..
혹시라도 그렇게 말할 사람이 있다면 그분들은 신경 꺼 주시기 바란다..ㅋ
지금도 청바지 길이와 폭을 조금 줄이는 작업중 이다..
결과는 나름 Good 이다..^^
중학교 2학년때쯤의 어느 가을날..
아버지가 이승의 손을 흔들고 먼길을 가신 그날부터 엄마의 재봉틀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마루 한켠에 놓인 재봉틀은 해가 바뀌어도 여전히 먼지를 뒤집어 쓴채 침묵 그대로 였다..
언제나 집안에서 살림만 했던 엄마는 이제 일터를 찾아 나서야했다..
세상이 당신을 위해 팔벌리고 있지 않음과 당신이 할일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음을
안순간 세상을 향한 회의와 자괴감도 들었을 것이다..
떨리는 손으로 처음 엄마의 지갑에서 지폐와 동전 몇개를 훔쳐내던날 밤..
나즈막한 엄마의 한숨소리에 가슴이 내려앉을 만큼 큰 죄책감에 잠도 못잤는데
아침에오히려 책상위에 돈을 놓고 나가신 어머니..
때론 잘못을 무조건 덮어주는것도 사랑 인걸까..
그래도 엄마는 자식들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일이 없이 혼자서 그 삶에 무게를
견디시며 살았다..
무엇하나 만만치 않은 세상을 향한 각오를 다지던 그때부터 엄마의 목소리엔
파란불꽃이 일었다..
엄마가 예상외로 예민해져 있을땐 일단 한발 물러나야 한다는걸 그때 알게됐다..
이젠 엄마는 더이상 재봉틀을 돌릴 여유가 없어졌다..
마루 한켠에 우두커니 서있던 엄마의 빨간 재봉틀은 어느날 그렇게 고물장사의
리어커에 실려갔다..
지금도 눈에 또렸한 그때 모습은 엄마의 흑역사의 한장면을 보는것 같아 마음이 아려온다..
엄마는 지금 얼마나 흘러 어느하늘의 구름이 되셨을까..
.
.
미싱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설명서 대로 따라하면 누구나 의외로 쉽게 배울수 있다..
좀더 배워서 손녀딸 원피스도 만들어 봐야 겠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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