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3. 29. 00:32ㆍ블로그 에세이/낙 서
(1979. 11. 강릉 오죽헌 )
기차는 무작정 달리기만 했다..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과 어딘가 에서 돌아가는 사람들은 기차의 흔들림도
잊은체 그저 고단한 잠에 빠져있었다..
지금 우리는 강릉으로 가고있다..
벌써부터 바다와 하얗게 포말로 부서지는 파도가 보이는듯 했다..
수원에서 살고있다는 그녀들을 만난건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었다..
하얀꽃잎 들이 나폴나폴 눈처럼 날리던 어느 5월의 봄날..
친구와 함께 대구엘 다녀 오는 밤기차 안에서 우연히 그녀들을 만났다..
그녀들은 객실 중간쯤에 앉아 있었으며 무엇이 그리도 재미 있는지 연신 깔깔대며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순수하고 맑아 보이는 그녀들에게 호기심이 작동했고 어느순간에 우린 그녀들의
일행이 되어 있었다..
그녀들은 그때 4명 이었는데 졸업여행 으로 처음 부산을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노래를 하고..게임을 하고..벌칙을 받고..
짧은 시간안에 경계심 하나 없이 어떻게 그리도 가까워 졌는지 알수없지만 연락하자며
서로의 주소를 주고 받았다..
그아이들은 그렇게 여운을 남기고 수원에서 내렸다..
그로부터 편지가 오고 갔다..
우리들은 용인의 자연농원(그때는 애버랜드를 자연농원 이라 불렀다)과 원천유원지..민속촌..
화성 성곽과 보통리 저수지.. 그리고 어딘지 모를 딸기밭등 으로 그아이들을 만나러 갔고
그녀들은 서울의 고궁과 남산..여의도 광장.. 명동과 종로등 으로 나들이를 했다..
순수한 아름다움이 보이기 시작했고 소중한 만남을 지속해갈 즈음에 어긋난 선택이 불러온
오해가 쌓이면서 균열이 생겼고 몇몇은 더이상 만날수가 없었다..
수원과 서울을 오가며 친숙해 졌고 이윽고는 형 이라 부르며 따르던 한아이와 편지를 주고 받았다..
수원역 앞의 역전다방 이란 곳에서 자주 만났고 그때마다 "송창식의 사랑이여"와
"윤항기의 장미빛 스카프"란 음악을 신청했으며 같이 따라 불렀다
냉큼 형 이라 부르며 따르던 그아이는 주저함이 없이 한걸음 더다가왔고
마치 오래된 사람처럼 어색함 없이 자연스러웠다..
맑고 밝은 성격이었지만 의외로 Saddest Thing (Melanie Safka) 이나
You're My Everything (Santa Esmeralda) 같은 팝 발라드를 즐겨듣길 좋아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편지가 왔고 또 답장을 썼지만 마음을 전하고 싶은 크기만큼 편지는
늘 느리게 갔고 느리게 왔다..
날이 갈수록 그아이의 눈이 서늘하고 깊어져 갔다..
유쾌한 아이였지만 어느순간 그 깊은 눈속에 나 자신이 들어있음을 느껴 알수 있었다..
매일 거짓말없이 당연하게 비춰주는 햇살처럼 어디에도 없는듯 어디에도 있는듯
곁에 없지만 늘 곁에 있는것 처럼 묘한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사랑이란 감정은 가슴을 태우기도 하고 못을 박기도 한다는것은 한참후
시간이 흐른뒤에 알게됐다..
걸음을 많이 때었는데..
한참을 걸어 왔는데..
여전히 우린 가까이만 있을뿐 서로의 손에 닿질 않았다..
그토록 오래 걸었는데..
이렇게 가까워만 보이는데 언제나 제자리 걸음 이었었다..
점점 열정이 식어가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아이를 조금씩..조금씩 밀어내고 있었다..
(1979. 11. 강릉 낙산)
언젠가 순아는 내게 느닷없이
"형은 애인 없어..? "
라고 하는 말에 헉 하며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빛보다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순아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얼핏 슬픈 우울함이 지나갔다..
그냥 만나는 것인지 사랑인지 모를 모호함을 빗댄 말 같기도 했고
자신을 확인 하려는 말 같기도 했다..
"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면 다 애인 이지.."
대답 역시 애매하게 했던것 같다..
왠지 그아이에게 사랑 한다는 말은 할수가 없었다..
귀엽고 좋은 아이였지만 하루도 보지 않으면 눈이 멀것 같고 생각 만으로 가슴 시린
그리하여 이윽고는 목숨 조차 아깝지 않은 그런 만남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더 많았었다..
어쩜 사랑은 아니라고 생각했었을 것이다..
" 우린 바보 같아.."
독백 같았던 그아이의 말에 가슴이 쿵 했지만 난 애써 옅은 미소만 띄우고 있었다..
어느틈엔가 경찰이 다가와 내 허리춤을 꽉 쥐어 틀었다..
꼼작을 할수가 없었다..
더럭 겁이 났다..
변명의 여지없이 현행범으로 잡혀 영등포 경찰서로 끌려갔다..
"담배꽁초 무단투척 으로 경범죄 제00조항 00조로 단속 합니다..
내일 오전 재판에 출정 합니다.."
날벼락이었다..
담배 한번 잘못 피웠다가 경범죄로 재판에 넘겨지게 된것이다..
꼬박 하룻밤을 경찰서 유치장에서 세웠지만 다음날 다행이 훈방조치 되어 재판까지
가지 않고 무사히 나올수 있었다..
밤새 비가 왔는지 하늘은 맑았지만 어디선가 물비린내가 배어왔다..
갑자기 휘청 거릴듯 머리가 아파왔다..
경찰서 에서 단 하룻밤을 지내고 나왔는데 왠지 정말 큰죄를 짓고 구치소에서 바로
출감한듯 자신이 구차해 보였고 세상도 달라진듯 보였다..
친구들과 같이 있었노라고 집에 전화를 했다..
무슨이유 에서 인지 집으로 가고 싶지가 않았다..
문득 그아이가 보고 싶어졌다..
무작정 수원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도 달려가야 했는지 내마음을 알수가 없었다..
바로 옆에서 달리는 자동차 바퀴에서 일으키는 새찬 물보라에 옅은
무지개가 피어나고 있었다..
또다시 깊은 상념에 잠기기 시작했다..
역전다방이 보였다..
왠지 그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날 기다릴것만 같았다..
가쁜걸음 으로 다방에 들어섰다..
있을리 만무한 그녀였지만 두리번 거렸다..
조금 이른시간 이었는지 다방안엔 종업원들 끼리 잡담을 나누고 있을뿐 어디에도
그아이는 없었다..
(어디에 있는거니..
내가 널 찿아서 여기 왔는데 넌 어디에 있는거니..)
홀로 커피를 마시며 고독을 씹고 있는데 내마음 아는지 거짓말 같이 "장미빛 스카프"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길고도 우울한 하루 였다..
"내가 왜 이럴까..오지 않을 사람을..
어디선가 웃으면서 ..와줄것만 같은데.."
(장미빛 스카프) -윤항기-
(1979. 11. 낙산사)
점차로 편지가 오가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편지는 이미 식어버린 열정을 오지않는 답장으로 말해주고 있었고 그아이를 만난지
몇번의 계절이 바뀌며 저만치서 겨울이 빠르게 오고 있었다..
한달만에 받은 편지엔 시청앞 에서 만나자고 써있었다..
편지엔 왠지 공허함이 묻어 있는듯 했다..
여의도 광장엔 하얀눈이 소복히 쌓였고 우리는 그눈위를 말없이 걸었다..
어색한 침묵이 게속 되었지만 누구도 먼저 말을 하지 않았다..
9개월 정도 지속되어오던 만남이 오늘로써 마지막 일것 이라는 예감이 밀려왔다..
내가 조금 앞서 걸었고 그아이는 내발자욱 위에 자신의 발자욱을 포개며 따라왔다..
"얘 이름은 꼬보야 .."
순아가 먼저 침묵을 깨며 주머니 에서 작은인형 두개를 꺼내 보였다..
"꼬보..? "
"응..꼬보..꼬마바보.."
"하나는 형꺼고 하나는 내꺼고.."
"꼬..보.."
순아는 작은 꼬보인형 하나를 내손에 쥐어 주었다..
그제서야 언젠가 순아가 우리는 바보 같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모호함에 변함없는 내모습이 그려졌다..
(그래.. 우린 둘다 바보 였나보다..)
외투 주머니 속에 잡고있던 그아이의 손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무작정 밤열차를 타고 내린곳은 대전 이었다..
엄동의 혹한속에서 갈곳없던 우리가 들어간곳은 새벽미사를 준비하던 어느 성당 이었다..
성당은 옅은 올겐소리와 함께 장엄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고 잠시후 미사를드리기 위한
사람들이 한 두명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구경하듯 미사를 마치고 여명이 올때쯤 수원행 고속버스에 다시 올랐다..
이른시간 인지 손님 없었다..
버스기사는 뽕짝을 틀어놓고 신이난듯 고속도로를 질주했다..
어깨에 기대어 있던 순아의 옆모습은 의외로 평온해 보였다..
가려진 커튼사이로 반짝 해가 빛났다..
그아이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아련하고 깊은 눈 이었는지 처음 알았다..
바로 코앞에서 그아이의 입술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 달리는 버스안에서 그아이의 푸르고 차가운 입술을 처음으로 만났다..
섬뜩 할만큼 차가운 입술 이었지만 가슴속엔 뜨거움과 동시에 진한 슬픔이
밀려오고 있었다..
"형..이제 다시는 편지도 하지말고 수원에 오지도 마.."
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그아이는 터미널 앞의 횡단보도를 뛰어 건너갔다..
그렇게 멀어져 가는 그아이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는것만이 내가 할수 있는
행동이었으며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이었다..
어떻게 집엘 왔는지도 모르게 피곤에 지쳐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는지 문득 잠에서 깨어나자 지난밤 일이 떠올랐다..
그아이가 떠난것이다..
언뜻 생각이 난듯 주머니속의 꼬보인형을 꺼내 보았다..
주근깨 가득한 못난 얼굴로 베시시 웃고 있었지만 그제야 불현듯 눈시울이 붉어져 왔다..
(1979. 11. 강릉 경포대)
뽀얀 담배연기 가득한 다방안은 이른 초저녁 시간부터 손님들로 가득 차있었다..
서라운드 돌비시스템을 완비한 다방안은 네귀퉁이에 100w짜리 스피커를 달아놓고
옆사람 말소리도 들리지 않을만큼 Hard Rock을 때려대고 있었다..
저녁7시..
이시간 부터 나에게는 또 다른세계와 또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이른바 음악다방 DJ 생활 이었다..
삼삼오오 모여앉은 사람들은 연신 신청곡을 적어 창구에 밀어넣기 바빴다..
신청곡이 잔뜩 밀려 있었다..
한쪽 구석엔 친구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바쁘게 움직이는 레지(원래는 레이디 였음..)들 에게
농담을 건네며 수작을 부리고 있었다..
입구에서 친구 재춘이가 들어오는게 보였다..
"어서오세요..양재춘씨.."
일부러 음악을 줄이고 마이크를 열어놓은 상태에서 멘트하듯 말을 했다..
일순간에 손님들이 재춘이를 쳐다보자 무안한듯 으쓱하며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바삐 친구들이 있는 자리에 합석했다..ㅋㅋ
그친구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신설동의 설계사무실에 취업을 해서
퇴근길이면 하루가 멀다하고 다방엘 들렀다..
재춘이가 담배 한개비와 메모지를 창구로 밀어넣었다..
웃으며 메모지를 펼쳐 보았지만 의외로 신청곡을 적은 메모지가 아니었다..
"수원에 출장 갔다가 우연히 정순이 만났다..
안부를 묻길래 말해줬는데 전화 올지도 모르고 혹시
다방으로 올지도 모르겠다.."
다소 충격적이고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정순이 라니..)
한때 아픔이고 시련 이었을지 모르지만 이젠 내기억의 갈피속에 묻혀있던 그때 열아홉살때의
그아이에 대한 기억은 저하늘에 숱하게 박혀있는 작은별들 중에 하나처럼 그저 추억으로
무심하게 느껴지고 있었을뿐 이었다..
(1979. 11. 낙산사)
전화벨 소리에 놀라고 손님만 들어오면 습관처럼 다방입구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녀와 비슷한 체형과 모습을 가진여자가 들어 오기라도 하면 왠지
가슴이 내려 앉는듯 했다..
긴장 하고 있는듯한 모습에 스스로 위안을 주어야 했다..
돌이켜보니 수원에서 마지막으로 헤어진지 불과 7개월 정도 지난것 같은데 마치
아득한 세월이 흐른듯 기억의 저편에 서있는것 같았다..
기어이.. 그녀가 다방에 들어섰다..
한순간 정지버튼을 누른듯 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손님들이 나만 바라보고 있기에 태연하게 진행을 계속 해야했다..
꽤오랜 시간을 그아이는 음악실앞 에서 홀로 앉아 있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죽치던 친구들의 모습이 오늘따라 보이지를 않는다..
반가움 보다는 서먹함이 먼저왔다..
서걱 거렸고 왠지 대화는 겉도는듯한 느낌이었다..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왔고 조금 야윈듯 해보였으며 연한 화장품냄새가 기분 나쁘지
않을만큼 풍겨왔지만 그때의 귀엽던 모습과 깊은 눈을 볼수가 없었다..
다만 시간이 흐른만큼 성숙해 보였다..
손님들은 좀전까지 음악실안에 있었던 DJ가 한여자와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있는 모습을
의심스런 눈길로 바라보며 지나갔다..
내게 잘어울리는 일이라며 수원의 역전다방에 가끔가는데 생각이 난다고 했다..
헤어지고 처음엔 조금 힘들었지만 친구들 만나면서 잘극복 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했다..
그때도 그랬지만 언제나 나보다 말이 많은 그녀는
대학을 가려고 학원엘 다닌다며 지난 세월의 공백이 무색할만큼 어느새
예전의 밝은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1979. 11. 강릉 경포대)
그녀를 태운 택시가 저만치 사라져 갔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택시의 뒷모습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이젠 검은 거리만 보일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상대의 슬픔을 덮어주기 위해 자신은 웃음으로 말하는 사람처럼 억지로 마주한 자리인듯
불편해 하는 내모습에 오히려 밝은표정 으로 덮어 주었지만
그녀는 속으론 울고 있었을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내 무표정한 모습과 묻는말에 성의 없는 대답만 했었는데
그녀는 악수를 청하며 내손을 잡아주고 떠났다..
조그맣게 한숨이 배어 나왔다..
왠지 돌아가는 택시안에서 변해버린 듯한 내모습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로
눈물을 흘리고 있을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에전같은 모습으로 좀더 따뜻하게 웃으며 그녀를 맞이해야 했을까..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이제 그녀는 다시는 만날수가 없을것이다..
그녀를 태운 택시가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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