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랑을 만나다.. ( 1 )

2024. 1. 21. 00:24블로그 에세이/추억만들기

창문틈으로 조금 환한 빛이 들어오는듯 싶어 황급히 지리를 털고 일어났다..

지난밤..

늦은시간에 들어온탓에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강진 읍내를

모텔방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비 가 올거라는 예보가 있어서인지 하늘이 심상치 않다..

그치만 햇볕이 쨍한 날씨 보다는 이런 잿빛하늘도

개인적으로 좋아(?) 하는지라 오늘도 Good Day 를 예감해 본다..^^

 

 

 

 

감성 강진의 하룻길..

어디서부터 시작이고 어디까지 인지 잘알수가 없다..

사전에 아무런 지식도 없이 마냥 맘닿는대로 길을 재촉하다 보니

좀더 공부를 하고 왔으면 좋았을걸 하는 자책이 든다..

하지만 말대로 하룻길 이라 하니 그리 긴 코스는 아닌듯 싶다..

그저 골목길에 들어서 영랑생가와 시문학파 기념관.. 현구길(시인 김현구)..

세계모란공원과 금서당을 둘러보며 가을의 넉넉함을 가슴에 담아봄직 하다..

골목길 벽엔 시와 자료들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어

작품들을 이해 하는데 도움이 된다..

 

 

 

 

영랑 생가..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남성리에 있는 영랑생가는 생각과 달리

의외로 강진 읍내에 위치해 있었다 ..

강진읍내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영랑 생가는 1948년 선생이

서울로 이주한후 전매 되었으나 강진군이 다시 매입하며

1986년 전라남도 지방 문화제로 지정 되었고 2007년 국가 지정 문화제로 승격 되었다..

다른 문화제 처럼 크게 울타리를 쳐놓고 현대와 구분 짖지 않았으며 입장료도 없었다..

그저 자동차로 혹은 걸어서 골목 끝까지 가다보면 그 끝에 생가가 있었다 ..

이웃집 마당에 들어서듯 그렇게 선생은 객들을 주저없이

맞이 하고 있었다..

 

 

 

누구나 한번쯤은 읽어 보았을 영랑의 시..

생가의 입구엔 영랑의 대표작인 "모란이 피기까지.."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생가에는 이 시비 이외에도 영랑의 대표작이라 할수있는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누이의 마음이 나를 보아라..등의 시들을

돌에 세겨 놓은 시비가 마당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모르게 농기구들을 모아 놓았다..

민속촌에 가면 흔히 볼수 있는..ㅋ

 

 

 

자그마하지만 깨끗하고 잘 꾸며진 본채와 사랑채..그리고 앞마당..

싸아 하고 대나무숲에 바람이 일면 봄날의 하루를 아쉬워하며

붉은동백이 잎을 떨굴것 같은 가파른 계단길..

대문앞 상수리 나무엔 귀가 따갑도록 매미가 울어대지만

쏟아질들 무수한 별들로 잠 못들게 하는 여름밤..

마당위로 하나가득 날아다니는 고추잠자리..

깨어진 장독도 왠지 이곳에서는 어울릴것 같은 느낌..

.

.

가을하늘은 마냥 높다랗기만 하다..

 

 

 

실제로도 저리 살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깨끗하게 정돈되 있지만 부엌살림이 단촐하다..

일제 강점기 시절에 본토 유학 까지 다녀올 정도라면

그렇게 궁핍한 생활을 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그는 부잣집 도련님 출신 이다..ㅋ

 

 

 

김영랑..

시인. 전남 강진 출생. 본명 윤식(允植).

단 한번도 본적이 없지만 초상화 에서 느껴지는

첫인상은 꺽이지 않을듯 매우 강인해 보인다..

1930년 박용철, 정지용 등과 함께 “시 문학”을 간행, 순수 서정시 운동을 주도하며

잘 다듬어진 언어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창조하는 데 힘썼다..

시집으로 “영랑 시집”(1935), “영랑 시선”(1939) 등이 있다..

본관은 김해 ( 나하고 같다..ㅋ).. 본명은 김윤식.. 영랑은 아호인데 시문학에

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아버지 김종호와 어머니 김경무의 5남매 중 장남이다..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혼인하였으나 1년반 만에 부인과 사별하였다..

아내를 잃은 슬픔을 

                  "쓸쓸한 뫼 앞에 후젓이 앉으면
                   마음은 갈앉은 양금줄같이 무덤의 잔디에 얼굴을 부비면
                   넋이는 향맑은 구슬 손같이 산골로 가노라 산골로 가노라
                   무덤이 그리워 산골로 가노라" 

라고 노래했다.

1917년 휘문의숙에 입학, 이 때부터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이때 휘문의숙에는 홍사용..안석주..박종화 등의 선배와 정지용.. 이태준 등의 후배

그리고 동급반에 화백 이승만이 있어서 문학적 안목을 키우는 데 직접 간접으로 도움을 받았다

1949년에는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평소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어 국악이나 서양명곡을 즐겨 들었고

축구·테니스 등 운동에도 능하여 비교적 여유있는 삶을 영위하다가

9·28수복 당시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주요저서로는 영랑시집 외에 1949년 자선으로 중앙문화사에서 간행된 영랑시선이 있고

1981년 문학세계사에서 그의 시와 산문을 모은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있다

묘지는 서울 망우리에 있고 시비는 광주광역시 광주공원에

박용철의 시비와 함께 있으며 고향 강진에도 세워졌다.

- 백과사전-

 

 

 

영랑의 집은 친일 성향에 가까웠다..


그역시 부유한집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가 독립운동을 벌였다는 사실은 조금 의문스러운 부문이기도 하다 ..

그의 부친은 강진의 큰지주 였다..

그렇기에 일제와의 친분이 있을수 밖에 없었지만 영랑은 부친과 달리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 만세 운동을 모의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일경에 체포되어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르는등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한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최남선, 이광수, 노천명, 서정주 등이

일제에 고개 숙일때 영랑은 의연히 붓을 놓고 지조를 지켰다..

 

 

 

 

생가 뒤편으로 이어진 이길은 모란공원으로 가는 길목이다..

붉은동백과 푸른 대나무가 어우러진 그날엔 가파른 언덕길도 쉬이 오를수 있으리라..

지금 이 대나무숲에선 차가운 가을밤 서늘한 귀뚜리 울음이 쟁쟁 하겠지..

영랑이 사색이 잠겨 시상을 떠올리던 이곳..

강진의 가을하늘은

참으로 곱고 예쁘기만 하다..

 

 

 

동백과 대나무길을 올라오면 비교적 너른 터가 나온다..

커다란 동백의 조형물은 이곳이 바로 세계모란공원 이란것을 말해준다..

억새와 구절초가 바람에 일렁이며 진한 가을을 예쁘게 물들이고 있다..

 

 

 

"장광에 골불은 감닙 날러오아

누이는 놀란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니리

바람이 자지어서 걱졍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은 장독 이라 하는데 온통 사투리로 쓰여진 시는 전라도 사람이

아니라면 알아먹지 못할듯 하다..^^

 

 



초가지붕 아래 마루바닥에 엎디어 사랑하는 이에게 고운 사연을

담은 편지를 쓰고 싶어지는 마음..

 

 

 

참으로 여유롭고 단란해 보이는 가족이다..

각자 어떤 시 세계에 빠져 있는걸까..

문득 내 모습을 보는듯한 착각이 들며 또다시 애굳은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내가 사랑 하던 사람들은  어디 있는 것일까..

갑자기 이슬이 핑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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