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8 화 보리수

2025. 4. 15. 00:23음악이 흐르는../음악에세이

 

 

(M)보리수   Der Lindenbaum / Nana Mouskouri

 

(E) 바람 소리 + 갈대 우는 소리

 

남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보이는 것 보다 조금 불행한 일이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보이는 것 보다 행복할 때도 있다

    바람의 향기나 

    갈대가 우는 소리로

    나만의 그림을 그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M) Vincent / Don Mclean

 

(E) 병원 복도 소음

남  횡단 보도를 건너다 작은 교통 사고가 났다

    분명 파란불이 켜졌다는 신호음을 듣고 건넜지만

    운전자는 내가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자마자

    빨간불일 때 건넜다고 우겼다

    살면서 이런 일들을 많이 당하기 때문에

    그리 억울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다친 다리는 많이 불편했다

    당분간 병원에 입원해 생활해야 했다 

    

(E) 절룩이며 걷는 + 부딪치는

남  아 죄송합니다. 제가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

 

남  늘상 하는 인사였다

    이렇게 먼저 얘기하지 않으면

    오해를 하고 욕부터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여  괜찮으세요?

 

남  맑은 목소리의 여자였다

    

남  네... 저... 714호가 어디쯤인가요? 

여  거기 입원해 계세요? 

남  네

여  제가 데려다 드릴께요. 전 그 옆방에 있거든요.

(M) 겨울일기 / 장나라

 

남  여자의 손에 이끌려 병실로 왔다

    내게 보조를 맞춰 주기 위해서였는지

    여자도 천천히 걸음을 걸었다

 

(E)문열어주는

여  다 왔어요.

남  고맙습니다.

여  꽃이 참 예쁘네요

 

남  오늘 아침 다녀간 여동생이

    장미꽃 한다발을 사왔었다

    싱그러운 향기가 병실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남  잠깐 뭐.. 음료수라도 드시고 가세요. 

    이제 옆방 친군데요...

여  (웃음) 그럴까요?

(M) If / Sissel

 

(E) 창밖으로 바람 부는 소리

남  가끔은 궁금해요.

여  뭐가요?

남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요...

여  ..........

남  (멋쩍은) 첨 뵙는 분한테 별 얘길 다하죠? 

여  .... 음.... 지금 밖에 바람이 많이 불고 있어요

남  ... 네... 바람 소리가 들려요

(E)창가로 다가가는

여  꼬마가 엄마 손을 잡고 가는데... 하얀색 외투를 입고

    하얀색 모자를 썼어요. 그리구 자꾸 병원 앞에서 파는

    호떡을 사달라고 졸라요. 엄마는 그냥 가자 그러구....

남  (웃음) ..... 네....

여  또.... 저쪽에선 한 노부부가 산책을 하고 있어요

    둘이 손을 꼭 잡고 가다가...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목도리를 매주고 있어요. 참 좋아 보여요...

 

남  그녀는 얼마 동안 내 병실에 머무르며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M) 풍경 / 시인과 촌장

 

남  알고 보니 우리는 동갑이었다

    자연스럽게 서로의 병실을 오가며

    우리는 친구가 되어갔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병실에서의 답답한 생활을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E) 똑똑 노크

남  네~

(E) 들어오는 

여  친구들이 과일을 사왔는데 좀 많은 것 같아서...

남  잘 왔어. 안그래도 심심했는데....

여  오렌지 좋아해?

남  응

(E) 오렌지 까는

 

남  방안으로 오렌지의 새콤한 향기가 퍼졌다

 

여  자.... 

 

남  그녀가 껍질을 까서 작게 조각내준 오렌지를

    입안에 넣었다. 그녀는 내 방에 올 때마다

    항상 이렇게 기분 좋은 선물 한가지씩을 

    들고 온다 

(M) Loving You / 신승훈

 

여  오늘은 눈이 오네....

(E) 창가로 걸어가는 

남  눈이 와?

여  응... 정말 예뻐....

남  어떤데?

여  거리도 나무도.... 다 하얗게 뒤덮였지 뭐.....

    꼭 영화에 나오는 외국 거리 같다....

남  그래? 

여  길이 얼어붙었나봐. 사람들이 옆사람들이랑 팔짱을 끼고... 조심조심

    빙판길을 걸어가... 여고생 애들은 조심성 없게 뛰어가다가 

    발라당 넘어지기도 하구.... 차들은 느릿느릿 도로를 꽉 메웠어....

    눈 오면 다좋은데... 차밀리는 건 좀 골치잖아...

남  ...... 또?

여  음... 또.... 와~! 어떤 남자가 여자한테 프로포즈하나봐.

    남자가 눈길 위에 무릎을 꿇고 여자한테 꽃다발을 주고 있어. 

    여자도 싫지는 않은가봐. 저 남자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니니?

남  .... 좋겠다

여  저 여자?

남  아니... 너...

여  왜?

남  그 많은 걸 다 볼 수 있어서....

(M) 영화보다 행복해 / 조트리오

 

(E) 원두 커피 머그잔에 따르는

여  커피향 좋다...

남  어제 여동생이 다녀갔거든...

여  늘 챙겨주는 그 동생?

남  응... 걘 나한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해

여  왜?

남  어렸을 때 동생이 사고날 뻔 한걸 내가 구했거든...

    그때 눈을 다쳤고....

여  .... 아....

남  그런 거 다 운명이라고 생각하는데...

    누구 책임도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난...

여  동생 입장에선 그렇게 생각하기 힘들겠지...

남  그래두...난 그냥.. 동생이 편하게 자기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는데....

    나 챙기느라구 아무 것도 못하는 것 같아서... 그게 좀 마음 아파...

여  이 머그잔도 동생이 사다준거야?

남  응

여  머그잔에 그려진 그림... 참 예쁘다....

남  그래? 어떤 그림인데? 

여  음... 커다란 나무 밑에 여자애가 책을 읽고 있어

    그 위로 나뭇잎 몇 개가 떨어지고 있고.... 

    부드러워 보이는 잔디가 바람에 흩날려...

    그 위에 그대로 누워서 낮잠이라도 잤으면 좋겠다.

 

남  그녀는 바로 눈 앞에 풍경을 그려주듯이 이야기하는 법을

    잘 알았다. 그래서 난 그녀와 있는 시간이 정말 즐거웠다 

(M) 뷰티플 걸 / 일기예보

 

남  넌 팔하고 허리를 다쳤다고 했지?

여  응

남  어쩌다 그랬어?

여  계단에서 굴렀어

남  응? 어쩌다가?

여  그냥.... 덜렁대다 그랬지 뭐.

남  얘기하는 거 보면 참 섬세할 것 같은데...

여  아냐. 나 무지 덜렁대.

남  너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다.

여  ...... 내가?

남  ...... 아니 뭐 별뜻은 없구.... 

    요즘 날마다 얘기하는 사람이 너밖에 없으니까.....

    또 목소리만 들으니까.... 궁금하다는거야... 그냥...

여  내 얼굴... 한번 만져볼래?

남  ..... 어?

여  어떻게 생겼는지... 그려볼 수도 있잖아

 

남  그녀의 따뜻한 손이 내 손을 잡아

    자기 얼굴 위로 올려주었다

    숱많은 눈썹과 작지만 오똑한 코. 부드러운 입술이

    손끝으로 만져졌다. 

(M) You Needed Me / Boyzone

 

여  어떤 것 같애?

남  엄청 못생겼을 것 같다

여  뭐?

남  (웃고) 내 얼굴은 어떻게 생겼어?

여  응?

남  어렸을 때 얼굴은 그냥 좀 기억나는데...

    커선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겠어. 옛날엔 나도 귀여웠는데... 

여  진짜?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망가졌냐?

남  야아...

여  (웃고) 어? 시간이 이렇게 됐네? 나 친구들 문병오기로 했는데...

남  그래. 가 봐.

여  어. 나중에 봐.

(E) 몇걸음 걸어가다가 와장창 넘어지는

남  왜 그래!

여  어.. 넘어졌어...

남  괜찮어?

여  ..... 응.... 이거 봐. 나 덜렁대지? 

(M) Right Now And Right Here/ Keren Ann

 

남  그녀가 병실을 떠난 뒤에도

    손끝의 감촉이 지워지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녀의 얼굴이 밀어내지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그녀를 기다리고...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이러면 안될 것 같은데... 

    나도 모르게 그녀를 많이 좋아하게 돼 버린 것 같았다...

(M)     Something Stupid / Robbie Williams & Nicole Kidman

 

(E) 똑똑 

여  네~

(E)문 열고 

남  난데.... 친구들이 과일을 사왔는데... 좀 많은 거 같아서....

여  그거 얼마전에 내가 써먹었던 거잖아? 좀 새로운 변명 없어?

남  .... 아..... 그랬나?

여  들어와 앉어..

(E) 천천히 들어오고

남  뭐하고 있었어?

여  응... 사진첩 보고 있었어

남  무슨 사진?

여  여행 갔던 사진...

남  어디로 여행 갔었는데?

여  난 대학교 때 세계 일주 했었어

남  와... 진짜?

여  응. 지금 보고 있는 건, 인도 갔을 때 찍은 거...

남  아...

여  보리수 알지?

남  보리수...?

여  왜... 부처가 깨우침을 얻었다는 나무 있잖아....

    그 나무 밑에서 찍은거야... 

남  그 나무는 어떻게 생겼어?

여  어? (약간 당황, 하지만 금방 침착하게) 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우선 굉장히 크고 잎이 무성해. 그늘이 넓게 지니까 그 아래는 

    정말 시원해. 그리구.... 

남  나중에 너랑 가보고 싶다

여  응???

남  나중에.... 너랑.... 그 나무 아래 가보고 싶다구...

    좋은 데... 좋은 거.... 너랑 같이 보고 싶어... 

(M) Once There Was A Love / Jose Feliciano

 

남  갑작스러운 고백이었다

    나조차도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고백이었다

    얘기를 꺼내놓고...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난 발을 까닥거리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남  오늘은 창밖이 어때?

여  ....... 글쎄... 아무 것도 안 보이는데....

 

남  그녀가 원하지 않던 고백이었다.

    하지 말았어야 했다

(M) Time To Say Goodbye / Andrea Bocelli

 

남  그뒤로 그녀는 내 병실을 찾지 않았다

    예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깜깜한 암흑이 나를 찾아왔다

    그러던 어느날....

 

(E)노크 

남  노크 소리만 듣고도

    난 그녀가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남  들어오세요

(E) 들어오는

여  나야...

남  어.. 오랜만이다... 

여  ... 어.... 

남  .....

여  ..... 나 퇴원해

남  .... 아.... 다 나은거야?

여  응. 이제 통원 치료해도 될 것 같아서...

남  잘됐다..

여  ..... 가볼게 그만...

(E) 천천히 돌아서 나가는

남  내가 안되는 이유가....

(E) 가다가 멈추는 

남  보지 못해서니?

여  .......

남  보지.. 못해서지?

여  ... 그래...

 

남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녀 입에서 그렇다는 대답이 나올줄은 몰랐다

여  .... 미안하다

(M) Sorry Angel / Jane Birkin

 

남  그렇게 그녀가 떠나고

    난 잠시 앓아야 했다

    오렌지 껍질을 벗겨낸 후

    그녀의 손에서 나던 그 향기와

    창가에 서서 창밖 풍경을 이야기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자꾸 떠올라 

    난 깜깜한 어둠 속에서 울어야 했다

 

(E) 문 열고 들어오는

여2 오빠~!

남  어. 수정이 왔니?

여2 어디 아퍼? 얼굴이 안좋다...

남  괜찮아. 뭐하러 자주 와. 

(E) 비닐 내려놓는

여2 오렌지 좀 사왔어. 먹을래?

남  됐어. 치워...

여2 왜 그래.... 

남  그냥... 기분이 좀 별로야...

여2 커피라도 마실래?

(E) 달그락 거리며 머그잔 꺼내는

(E) 원두커피 따르는

여2 자.. 

남  됐다니까....

(E) 툭 치고 쨍그랑 깨지는

여2 어떡해... 잔 깨졌네.... 

 

남  그녀가 예쁘다고 했던 그 머그잔이다...

    

(E) 조각 치우며

여2 이거 진짜 특이한 꽃무늬라... 어디서 잘 팔지도 않는건데...

남  .....!! 너 방금 뭐라 그랬어?

여2 어? 잘 팔지도 않는 거라구....

남  그 머그잔에 그려진 게... 꽃그림이라구?

(M) 짧은 

 

여2 왜 그래 오빠? 

남  자세히 말해봐.... 어떤 꽃그림인지...

여2 노란색 해바라기야. 왜 그러는데....

남   커다란 나무 아래... 여자 아이가 책 보고 있는 그림 아냐?

여2 아닌데?!

남  ............

 

남  이상했다. 뭔가 이상했다.

 

남  수정아. 지금 창밖으로 뭐가 보여?

여2 창밖이라니?

남  창밖으로 보이는 거 말해봐....

여2 바로 앞이 건물이라 아무 것도 안 보여...

남  뭐?

여2 이 건물 바로 앞에 높은 건물이 막고 있어서... 아무 것도 안 보인다구...

(M) Adle E Aleina / Silje Vige

 

남  그녀가 지금까지 내게 보여준 풍경들은 다 무엇이었을까...

    왜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E) 문열고 들어오는

남  알아봤어?

여2 응. 윤은서.. 맞지? 옆방 환자...  

남  그래. 뭐래?

여2 그쪽도 오빠처럼...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는데?

남  .....!!!

여2 몰랐어? 간호사 언니 말론, 오빠랑 꽤 친한 것처럼 보였다던데....

남  ..... 연락처는? 혹시 연락처 같은 거 물어봤어?

여2 연락처는 왜? 옆방에 있잖아...

남  아직.. 있다구? 퇴원한 거 아니구?

여2 오면서 살짝 보니까... 그 방에 있는 것 같던데? 이쁘장하게 생겼더라...

 

남  그방에... 그녀가 있다...

(M) Mai Piu Cosi Lontano / Andrea Bocelli

 

(E) 노크 소리

여  (힘없는) 네...

(E)들어가는

여  .... 누구?

남  나야

여  (당황) 누구세요? 방 잘못 찾아오신 것 같은데...

남  니 목소리... 못 알아들을 정도로 바보 아니야 나...

여  ............ 미안해

남  다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

여  ...........

남  보리수는 어떻게 생겼어?

여  .........

남      ........ 니가 직접 보지 않았어도 괜찮아. 니 머릿 속에 그려진 보리수가

    나한테도 진짜야. 

여  ....... 미안해... 

남  고마워. 그 동안... 내 눈이 되어줘서....

    니가 본 것들... 니가 얘기해준 것들... 다 나한텐 진짜였어... 

(M) 사랑해 / 소울 & 진

 

(E) 갈대 우는 소리 + 바람 부는 + 그 사이로 걷는

 

여  어둠 속에서 난 항상 상상을 해

    지금 창밖엔 눈이 올거고...

    그 눈을 맞은 아이가 깔깔대며 케익가게로 뛰어갈거고...

    엄마는 아이가 넘어질까봐 안절부절대면서

    종종 걸음으로 아이 뒤를 쫓아갈거고...

    하지만... 상상 속의 그림을

    누군가에게 말한다는 건 참 어려웠어...

    보지 않아도....

    상대방이 날 가엽다는 듯이 바라볼 걸 

    알 수 있었으니까.....

    그치만 넌 달랐어....

    넌 모든 걸 진짜라고 느껴줬으니까....

    그래서 더 많이 이야기 해 주고 싶었어.

    그러다 나중엔 덜컥 겁이 났어....

    모든 걸 다 알아버린 니가....

    날 얼마나 경멸할까.... 

    무서워서 도망간거야....

(M) Not Going Anywhere / Keren Ann

 

(E)걷는 소리 계속되고 

남  우리... 보리수 그늘 아래 가볼래?

여  바보... 우리 나라엔 보리수 없대. 그건 열대지방에서만 자라는 나무라던데?

남  보이지 않는다는 게... 보이는 것보다 대부분은 더 불행하지만...

    아주 가끔은... 더 행복할 때도 있어.

    그래야 공평하지..

여  (미소) 무슨 소리야...

남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여기가.... 어디든 될 수 있잖아.

 

(M) Prayer / Andrea Bocelli

 

여  나... 진짜 해보고 싶었는데 못해본 거 있어

남  뭔데?

여  지난번에 니가 내 얼굴 만져볼 때...

    나도 니 얼굴 만져보고 싶었거든.... 

    너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

(E)바람 소리 + 갈대 우는 

남  바람이 불어와 그녀와 나 사이를 휘감고 지난다

    그녀의 따뜻한 손이

    내 이마와 눈과 코와 입술을 만지고 지나간다

    우리 두 사람이 서 있는 그 자리 위로

    아름다운 보리수가 자라

    커다란 그늘을 만들어 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 속에

    우리는 서 있다.

(M)주제음   Der Lindenbaum / Nana Mouskou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