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화 호수로 가는길

2024. 2. 7. 02:39음악이 흐르는../음악에세이

 

나를 위해 쌀을 씻고 나물을 무치던 아내,
셔츠를 다려주고 넥타이를 골라주던 아내,
그 아내를 잃어버린 나는 몹시 허둥대고 있다.
왜 사랑은 잃어버린 후에야 그 맨살을 드러내는지.
깊은 그리움과 아쉬움과 고마움을
왜 뒤늦게서야 가르쳐주는지.
사랑은 왜.

신문사의 공기는 언제나 후끈거렸다.
취재에 쫓겨, 특종에 쫓겨, 마감에 쫓겨,
난 언제나 숨쉴틈 없이 뛰고 있었다.
그런 내게 아내는 자주 전화를 걸어주었다.

"네, 김봉덕입니다."
"여보, 난데요."
"어, 왜?"
"나, 행운목을 하나 샀는데 글세, 꽃집 주인이 말이에요."
"아 당신, 그 얘기 하려고.. 다른말 아니면 끊어!"

아내의 전화는 매번 이런식으로 끊어졌다.

언제나 새벽늦게 들어온 나를 아내는 지치지도 않고 기다려 주었다.
작은 소파위에 조그마한 몸을 더 작게 구부리고 앉아서.


"어, 이제와요?"
"먼저 자지 왜 그렇게 청승을 떨고 있어"
"저 당신 이번 주말에 많이 바빠요?"
"왜?"
"우리 같이 여행이나 갔으면 하고 나 가고 싶은데가 있는데."


난 바쁘다고 잘라 말했다.
최근 회사일이 바쁘고, 몸도 좋지 않았다.
나의 대답을 들은 아내는 그냥 묵묵히 내 옷을 받아서 방으로 들어갔다.
아내가 동그랗게 구부리고 앉았던 자리에 누렇게 말라죽은 행운목이 놓여있었다.

어느날 아침, 먹고 싶지 않은 아침밥을 억지로 먹고 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내가 입을 열었다.


"당신 처음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했던 날, 기억해?
그날밤 눈이 참 많이 왔잖아요.
당신이 나 집에 데려다 주다가 그랬는데 이제 네가 친구 이상으로 보인다고
나 사랑한다고 그때 당신 조금 떨고 있었는데... 기억나요? "
"어"
"당신 아직도 그마음 그대로 나 사랑해?"
"아, 그래."
"그렇지? 나 사랑하는 거지?"
"야, 물있냐? 물좀 주라."


아내가 무슨 대답을 듣고 싶어하는지, 난 알고 있었다.
괜한 심술에, 이유 모를 자존심에
아내가 듣고싶어하는 대답은 해 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거짓말처럼 아내가 사라졌다.
언제나 하얀 빨래가 펄럭이던 베란다에도, 늘 찌개가 끓는 소리로 따뜻했던 주방도,
아내는 없었다.
내 아내가 사라져 버렸다.
바쁜 일과중 걸려오던 전화도 사라졌고,
아내가 동그랗게 등을 구부리고 앉아있던 자리에 놓여있던 행운목도 사라졌고,
아침마다 억지로 밥을 먹는 내게 물컵을 내밀던 아내의 흰 손도 사라졌다.


아내가 떠난 후 처음으로 아내의 옷장을 열어본다.
아내가 한 번쯤 입었을텐데도 난 처음 보는 옷들이 여전히 얌전히 걸려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낯선 일기장 하나가 놓여있었다.
그곳에서 난 꼭꼭 눌러쓴 그녀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아니 언제나 내 귀에 속삭였을지도 모를 아내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시장에 다녀오던 길에 꽃집에서 행운목을 샀다.
사람 좋아보이는 주인이 웃으며 말했다. '행운목이 사랑을 가져다 줄 거라고..'
정말 그럴 수 있을까?
너무 멀어져버려 보이지 않는 우리 사랑이, 이 화초 하나로 되살아 날 수 있을까?"


그랬다.
아내가 작은 설레임으로 내게 전화를 걸었을 때, 난 그녀에게 화를 냈었다.
내 삶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내 삶의 이유인 그녀에게 나는 화를 내곤 했었다.

"오랫동안 물을 주지 않아 죽어버린 행운목.
화분을 베란다에 내어놓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아주 오래전 어느날, 우리의 사랑이 푸릇하고 어여뻤을 때
이른 새벽 나를 찾아온 그가, 내 손을 잡고 데려갔던 그곳 호숫가..
그곳엔 아직도 안개가 낮게 내려앉아 있을까?
낚시꾼들이 얼음이 얼기를 기다리며 서성이고 있을까?
피곤에 지쳐 들어온 그에게 불쑥 여행을 가자고 얘기했다."


나는 싫다고 했었다.
실망으로 떨리는 그녀의 속눈썹을 모른채하며, 난 싫다고 했었다.

"오늘은 내 생일이다.
오랜만에 그의 회사 앞으로 갔다. 동료들과 어울려 어디론가 향하는 그를 봤다.
그는 웃고 있었다. 그가 웃을 줄도 아는구나.
내 앞에선 웃지 않는 그..
이젠 그를 웃게 만들지 못하는 내가, 많이 초라했다.
그래서 돌아섰다. 바람이 많이 차가웠다."


그리고 다음 날, 아내는 내 삶속에서 조용히 빠져나갔다.

사랑 때문에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내 아내, 그녀를 웃게 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무엇이든 하겠다고
비가 오는 하늘에 큰 소리를 치던 날이 있었다.
이렇게 쉽게 끄집어 낼 수 있는 기억들을 왜 그동안 외면하고 살았을까?
왜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했을까?
그녀에게 가는 길이, 지금 이 시간이 늦지 않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호수는 옛모습 그대로다.
새벽별을 가득 담고 잔잔하게 흔들리는 수면, 그 평화로운 모습까지도.

조금씩 새벽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고 있었다.
별은 푸른하늘사이로 사라지고, 촉촉한 이슬을 머금은 숲은 더욱 선명한 빛깔로 빛나고,
호수 위로 낮게 나는 새들은 작은 물방울을 튕기고 있었다.
그리고 안개가 걷힌 길 저 너머로 누군가 오고 있었다.
베이지색 스웨터로 좁은 어깨를 감싼 여인, 바로 내 아내가..


"여보 나야..
여보 나 그러니까 지금껏...
정말 미안해 그동안 그동안 나 당신 너무..."
"좀 늦었네 당신."
"응 안개 때문이야, 안개가 막"
"올줄 알았어요. 그리구 당신이 날 사랑한다는 것도..
그래서 내가 당신을 초대한 거야, 여기 호수로
여기 정말 그대로지? 오느라 수고했어요.


난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첫사랑을 고백할 때처럼 아내의 손을 꼭 잡고
그녀의 깊은 눈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사랑은 화초를 키우는 일과 같다고 했다.
결에 내어주고, 물기를 머금게 해 주고,
마른 헝겁으로 잎을 닦아주기도 해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알겠다.
소중한 사랑을 오래오래 지키는 법을.
내 어깨로 살포시 다가오는 아내의 체온이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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