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2. 3. 00:09ㆍ음악이 흐르는../음악에세이
그 마을로 돌아왔다. 10년 만에...
아직도 노을이 질 때면 밥 짓는 연기로 가득한 마을,
아직도 하루에 한 번 뿌연 연기속에 버스가 오고,
아직도 우체부가 올 시간마다 동구밖을 기웃거리는 머리 흰 할머니가 있는,
작고, 오래되고, 따뜻한 마을.
그 마을로 돌아왔다.
아직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련한 추억이 서린 마을.
아직도 떠올리면 가슴뛰는, 내가 사랑하던 소녀가 살던 마을.
그리고.. 내가 살던 마을.
그 소녀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과
그리고 아직도 풀리지 않은 그 소녀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이 마을로 돌아왔다.
까까머리 소년이었던 내가단발머리 소녀, 그녀를 만난 건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서였다.
그녀는 빨래를 널고 있었다.
늦가을 햇살이 마당가득 쏟아지고 있었고,
소녀는 검은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흰 빨래를 널고 있었다.
까치발을 들고 서 있는 가는 종아리와, 한껏 길게 뺀 채 하늘을 향해 있는 하얀 목덜미,
그리고 가뿐 숨을 내쉴 때마다 살짝 패인 볼,
한창 넋을 잃고 바라보고있던 난..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깜짝 놀라 서둘러 자전거 위로 올라탔다.
기쁘게 뛰는 내 심장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마을에 있는 유일한 학교, 이 작은 학교 안에서 그녀에 대해 알아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이름은 오주현.
나와 같은 학년이었고, 읍내에 있는 성당에 다니고 있다 했다.
주현에 대해서라면 뭐든지 알고 싶었다.
주현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의 첫사랑이었다.
일요일마다 나는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다.
걸을 때마다 삐그덕거리는 나무바닥이 있었고, 따뜻한 풍금소리가 머물던 곳.
무엇보다 주현이 사랑하는 곳.
난 처음으로 찬송가를 불렀고 기도했다. 주현을 위해서..
점점 성당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녀가 노래를 부르는 중창단에 들어가기 위해서 기타를 배워야 했고
그녀가 봉사활동을 하는 고아원에 따라가 못질을 하고 이불빨래를 해야 했다.
"아씨 힘들어 죽겠네 집에서 한 번도 안해보던 빨래.
어후 발시려, 어후."
"봉덕아"
"어, 주현아^^"
"힘들겠다.. 혼자 이걸 다 하는거야?"
"힘들긴.. 나 집에서 맨날 하는 게 이불빨래야.."
"어머니일 도와드리는 게 내 취미거든."
"그래? 내가 좀 도와줄까?"
"괜찮은데."
주현과 함께 물기 가득 머금은 빨래를 짜고, 하얀 빨래를 탈탈 털어 줄에 널었다.
우리는 그렇게 조금씩 친해지기 시작했다.
12월이 왔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고 성탄절 행사를 위해 연극, 노래, 낭송할 시들을 준비하느라
성당 친구들은 무척 바빠졌다.
주현이 마리아 역할을 하게된 걸 안 나는,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 역할을 하겠다고 적극 나섰고,
매일 저녁 주현과 함께 연극 연습을 할 수 있게 되어.. 행복한 겨울이었다.
연극 연습이 끝나면, 난 주현을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자전거 뒷자리에 앉은 주현의 조용한 숨결을 느끼며 칼바람이 차가운 것도 느끼지 않았다.
"괜찮아? 안추워?"
"응, 괜찮아."
"날마다 연극 연습하는거 안 힘들어?"
"내가 좋아서 하는건데 뭐 넌?"
"나두 니가 좋아서 하는거야
내가 좋아하는.. 너랑 같이 하는 거니까.
널 정말 많이 좋아해."
그러나 다음날부터 주현은.. 연극 연습에 나오지 않았다.
마리아 역할 역시 다른 여학생이 맡게 되었다.
혼란스러웠다.
내가 그렇게 싫었을까..
좋아하는 마음을 알았다고 피해야 할 정도로,
서둘로 고백해버린 나의 성급함이 싫었고, 내 마음을 몰라주는 그녀가 싫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는 미련한 내 마음이 더 싫었다.
처음으로 다른 사람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크리스마스 이브가 왔다.
요란스럽게 성탄절 행사가 진행되었지만 난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무대에 올라선 난.. 작은 성당을 가득 메운 사람들 중..
혹 주현이 있지 않나 계속 살펴야 했다.
내가 대사를 할 차례가 왔을 때였다.
조용히 문이 열리고, 하얀 눈을 털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녀였다.
연극이 끝나자마자 주현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당을 막 빠져나가고 있는 그녀를 발견할 수가 있었다.
"주..주현아!"
"어.. 봉덕아.. 오랜만이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검은 머리 위로 눈이 쌓여가고 있었다.
"미안해 나 미웠지? 그치만 나도 어쩔수가 없어.
나한텐.. 정말 사랑하는 분 따로 있거든.
우린 아직 어리잖아.
너 정말 좋아하는 사람 또 생길거야 미안해 정말.
그분이 누구냐고 물었지만
그녀는 잔잔한 미소를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후로 난 성당에 나가지 않았다.
질투와 미움으로 수많은 밤을 하얗게 지샜다.
과연 주현이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리고 얼마 후, 우리집은 서울로 이사하게 되었다.
서울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작은 마을, 그 마을속에 서린 추억과 그녀를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봉덕아, 봉덕아!!"
그녀였다. 주현이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주현아!"
"이거 이거 주려고."
그녀의 작은 손이 꼭 쥐고 있던 것은 십자가 묵주였다.
"나중에.. 나중에 꼭 한 번 우리마을에 다시 들러.
너 마음이 편해졌을 때.. 알았지? !"
주현이 멀어지고 있었다.
나를 향해 흔드는 그녀의 작은 손을 보며
난 그녀가 영원히 내 기억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예감했다.
난 다시 이곳에 돌아왔다. 10년 만에..
그동안 난 하루도 주현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 그녀가 정말 좋아하는 분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그녀를 만났던 작은 성당,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했을 이곳, 내가 그녀를 위해 기도하던 이곳.
"누구? 봉덕이니? "
이곳에서 그녀를 다시 보고 있다.
"와주었구나 언젠가 한 번은 니가 올 거라고 생각했어."
여전히 아름다운 그녀.. 그녀는 검은색 수녀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흰 팔목에는 그녀가 내게 주었던 십자가 묵주가 걸려 있었다.
"나 어때? 내가 정말 사랑하는, 이분이랑 함께 살고 있는데 행복해 보여?"
창문으로 쏟아지는 겨울 햇살을 등지고.. 그녀가 눈부시게 웃고 있었다.
나도 그녀에게 조용히 미소를 짓는다.
가질 수 없기에 더욱 아름다운, 기억속의 그 소녀에게 보내는 마지막 선물이므로..
'음악이 흐르는.. > 음악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 9 화 마지막 첫눈 (2) | 2024.02.18 |
---|---|
제 8 화 호수로 가는길 (4) | 2024.02.07 |
제 6 화 슬픈미련.. (2) | 2024.01.30 |
제 5 화 피아노 (0) | 2024.01.26 |
제 4 화 이별여행 (0) | 2024.0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