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화 마지막 첫눈

2024. 2. 18. 00:18음악이 흐르는../음악에세이

 

첫눈이 언제 오는지 알고싶다며 보채던 딸아이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내가 만들어준 흔들의자에 앉아 커다란 무릎담요를 덮은채..

창밖을 본다.
겨울바람이 마지막 떨어진 낙엽들을 크게 휘몰아 갈 뿐, 눈올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어느새 눈앞이 뿌옇게 흐려진다.
첫눈은 언제 올까?

난 딸아이에게 정이 없었다.
사랑하던 아내가 딸을 낳다가 세상을 떠난 후로, 난 그 누구에게도 정을 줄 수가 없었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던 딸 주현이를 의사손에 맡겨두고
난 세상에 없는 아내를 찾아 헤맸다.
아내를 다시 볼 수만 있다면.. 그 누구를 데려가도,
나 아니 딸아이를 대신 데려가도 괜찮다고 기도한 적이 있었다.
내 딸 주현이를.

하지 말아야 할 기도를 한 죄일까.
신은 아내를 다시 되돌려주지도 않으면서, 내 어린 딸을 데려가려고 하고 있다.
열 다섯 해를 살아온 주현이가 그동안 어떤 병을 앓고 있었는지 너무 늦게 알게된 그날
난 한참 예배중인 교회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절규했다.
나를, 아버지 자격이 없는 나를 대신 데려가달라고.
꼭 그렇게 해달라고 목놓아 울부짖으며 기도했다.


"아빠, 왜 그렇게 봐?"

어느새 잠이 깬 딸아이가 날 빤히 보며 웃는다.


"응, 우리 주현이가 엄말 너무 닮아서."
"치이, 엄마가 이렇게 이뻤어?"
"그럼, 엄마가 주현이만했을때 얼마나 이뻤는데.
오죽하면 아빠가 눈오는 날, 엄마 방 창문앞에서 꼬박 밤을 새웠겠니.
나 한 번 만나달라고."
"정말?"

벌써 스무 번도 더 해준 얘긴데 딸아이는 이 이야기를 너무나 좋아한다.
웃는 딸아이의 얼굴을 보면 가슴이 미어져와 그 애와 눈을 맞출수가 없다.


집안에 있기 답답하다는 딸아이를 업고 산책을 나왔다.
싸늘한 바람이 귓볼까지 차갑게 얼었지만, 주현은 시원하다며 내 등속을 파고 들었다.


"아빠, 나 무겁지?"
"그래, 너 다이어트좀 해라. 몰 먹구 이렇게 쪘어."


다행이었다. 딸아이가 내 등 뒤에 있어 내 눈물을 보지 못한 것이.
솜털처럼 가벼워버린 내 딸 주현.
이 가벼운 아이를 업고서라면 세상 어디라도 가지 못할 곳이 없을 텐데.
이 아이의 병을 고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텐데.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과연 얼마일까?


"주현아, 생일 축하한다."
"응 아빠, 나 겨울에 태어나서 엄마 고생 많이 했겠다, 그치?"
"그럼, 그때 눈이 너무 많이 와서 택시는 안잡히는데 너는 나오려고 그러지,
엄마는 죽겠다고 쓰러지지.. 아빠 그때 고생한거 생각하면."
"미안해, 아빠."
"무슨소리야?"
"내가 태어나서 미안해.
안그랬음 엄마도 살 수 있었을 거고, 지금 아빠마음도 이렇게 아프지 않을 텐데.
나까지 떠나고 나면 아빠 어떡하지?
아빠, 나 태어나서 정말 미안해."


정말 미안한 건 나였다.
딸 때문에 아내가 죽었다는 생각에 딸아이를 원망한 때도 있었다.
그리고 깊은 정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딸아이는 내가 살아있는 유일한 의미였다.
아내가 떠난 후 이렇게 살아있지만, 그러나 딸아이가 떠난다면 정말 살 수 없을 것만 같다.


따뜻하게 덥혀진 방에 딸을 눕혀놓고, 솜이불을 어깨까지 끌어올려 덮어놓고
댓돌위에 쭈그리고 앉아 별을 보고 있다.
총총한 별들이 하늘에 가득한 걸 보니 내일도 첫눈은 오지 않을 모양이다.
하늘도 너무하신다고, 다 죽어가는 애가 첫눈 보고싶다는데
그것도 안 들어주냐고 격하게 따지다가 아차 싶었다.
보고싶어하는 걸 보고나면 딸아이에게 아무 미련이 없어져버리지 않을까.
미련이 없어지면 더 쉽게 가버릴 게 아닌가.
난 그냥 별만 바라보고 있다.


딸아이의 잠자리를 봐주던 참이었다.
그런데 말간 눈빛으로 나를 보던 주현이 말했다.


"아빠, 나 아까 소원얘기 안했지? 촛불 끌 때 말야."
"그래, 생각났어?"
"응 뭐냐면, 올해 첫눈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하고 맞고 싶어."


딸아이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랬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의 딸은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빠."
"응"
"그 사람은 모르는 것 같애.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나 그사람 정말 오래오래 사랑하고 싶은데."


"자, 주현아 약먹자."
"아빤, 노크도 안 하곤."
"어, 아.. 미안해. 모 그리고 있었어?"
"비밀."
"섭섭한데. 우리 주현이가 아빠한테 비밀이 다 있어?"
"응, 내가 사랑하는사람 그리고 있었단 말야.
다 그리고 나면 그 사람한테만 보여줄거야."


주현이 먹을 약과 물컵을 옆에 두고 나오며 어쩔 수 없는 서운한 감정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내 딸이 아름다운 사랑의 기억을 가지고 떠날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우습지만, 딸아이의 사랑을 받고 있는 그 사람이 조금은 부러웠다.


새벽부터 하늘이 심상치 않다.
낮게 깔린 구름과 검게 움츠려진 나무들, 그리고 찬바람에 실려오는 차고 촉촉한 이 향기.
첫눈이 오려하고 있었다.
딸아이는 조금 더 매마르고 창백한 입술로 쉴새없이 중얼거렸다.
다행이라고, 이렇게 첫 눈을 볼 수 있어 다행이라고.
난 마음이 조급해졌다.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지고 싶다는 것도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과 오래오래 함께 있고 싶다는 것도 아닌,
단지 첫눈을.. 사랑하는 사람과 맞고 싶다는 작은 소원을 들어주어야 할 것 같았다.
아직까지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 아비로서, 이것만은 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딸아이의 방문을 열었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사랑스런 체취가 느껴졌다.
딸아이의 이 체취가 너무 그러워지면 어떻게 하나?
이런 생각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붉어진 눈자위를 누르며 사랑하는 사람을 그렸다는 딸아이의 스케치북을 꺼냈다.
그리고 책장을 넘겼을 때..


그곳엔, 내가 있었다.
사랑을 주기에 인색했던 나를, 오랜 세월 외사랑해온 나의 딸.
내 딸이 스케치해놓은 나의 눈, 머리칼, 입술..
내가 그 안에서 웃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좁은 길 위로 회색 눈발이 휘날리고 있다.
난 주현을 업고 이 길을 걷고 있다.
한층 더 가벼워진 딸아이의 가여운 몸을 감싸안은 채 기도한다.
만약 이 다음 세상이 있다면 또 한번 아버지와 딸로 만나자고,
그땐 사랑할 수 있을만큼 사랑하겠다고, 그리고 함께 하겠다고.
눈발이 거세지고 있었다.
우리가 함께 맞는 마지막 첫눈이, 우리들을 감싸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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