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 26. 00:24ㆍ음악이 흐르는../음악에세이
새벽에 서리가 내려서일까.. 녹차밭이 은빛으로 빛나고 있다.
따뜻한 스웨터라도 걸치고 산책을 나가볼까?
난 지금 아주 오랜만에 여유로운 휴식을 즐기고 있다.
지난 일년동안 난 한 권의 소설과 한 권의 시집을 완성했고,
그덕에 조그마한 차밭이 달린 통나무 집을 얻게 되었다.
은은한 통나무 냄새와 풋풋한 바람의 향기와 함께
이곳에서 오랜만에 진정한 삶의 여유를 느끼고 있었다.
한여름에 따온 어린 찻잎으로 끓인 녹차 한 잔,
그리고 이 아름다운 고요..
이 아름다운 고요를 깨는 저 소리.. 내가 가장 싫어하는 피아노 소리.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작은 집,
분홍빛 커튼이 드리워진 창문 안에선 여전히 소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더이상 견딜수가 없었다.
"누구세요?"
"저 옆집인데요"
"네 무슨 일이세요?"
순간, 숨이 멎는것 같았다.
그순간 난 천사를 본거라고 생각했다.
"저 무슨 일로 오셨어요?"
"아, 네 피아노 소리가 하두 듣기 좋아서.."
"시끄러우셨을텐데.."
"시끄럽긴요. 제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소리가 피아노 소린데요.
너무 완벽한 연주였던것 같아요."
"아 제가 친 게 아닌데."
"네?"
"피아노 배우는 애들이 친 거에요.
여긴 피아노 학원이 없어서요.
배우고 싶어 하는 아이들 몇 명. 제가 가르쳐 주고 있어요."
"아 예 그러셨구나. 어쩐지 그러셨구나"
"네?"
"저도..피아노 배울 수 있나요?"
"예에"
"저도 좀. 가르쳐 주세요. 피아노."
그날 이후 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늦가을 햇살이 거실 깊숙히 스며들어 오고,
내 뒤에 선 그녀에게서 싱그러운 비누향기를 느꼈다.
"손은 동그랗게 모아야지요."
"여기. 손목은 그대로 고정하구요. 손가락만 움직이세요."
"저기... 이.. 이렇게요?"
"아.네.잘하시네요."
그녀가 내 손을 잡았다.
그녀의 비누향기가,
그녀의 따뜻한 체온이 내 가슴속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내 사랑도 깊어져만 가고 있었다.
"수고하셨어요. 아, 이제 많이 좋아지셨네요."
"다 선생님 덕분이죠 뭐."
"저 차 한잔 하실래요?"
그녀는 참 따뜻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저 눈이 기쁘게 웃을 수 있는 일이라며는, 난 뭐든지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좋아하는 여자한테 선물할 수 있는 그런 노래 그런 곡이 뭐가 있을까요?"
그날부터 난 '엘리제를 위하여'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일어날 때도, 산책할 때도, 차를 마실 때도, 밥을 먹을 때도
내 손가락은 언제나 무릎위에서 '엘리제를 위하여'를 연습하고 있었다.
그녀가 바로 엘리제였다.
"아.. 이제 잘 치시네요."
"아직 멀었죠."
"그 여자분, 정말 좋아하시나봐요?"
"네?"
"아 왜 이곡 선물하시려는 분 말예요."
네 정말 많이 좋아하고 있어요. 당신만을요.
그러나 간절히 하고 싶은 이 말을. 아직은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이제는 나의 사랑을 말해도 될까.
아직 조금더 기다려야 할까.
하루에도 수백번 씩 마음을 바꿔가며 고민하는 어느날,
나는 잘 말린 차잎을 예쁘게 포장해서 그녀에게 가지고 갔다.
그녀의 집앞에 차 한대가 멈췄다.
그리고 거기서 내린 남자는 한 눈에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다.
화려한 꽃바구니와 함께 당당한 걸음걸이로 남자가 그녀의 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커튼사이로 놀라는 그녀의 얼굴이 보였고, 잠시후 남자는 그녀의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리고 연주를 시작했다.
그 곡은 바로 내가 그녀에게 바치고 싶은 연주곡이었다.
그가 그녀에게 해주는 연주를 들으며 난 그녀에게 해줄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생각했다.
그녀에게 훌륭한 연주를 해 줄 수 없고,
그녀를 놀라게 할 수도 없고,
그녀를 웃게 할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녀를 사랑할 수 없다.
그래선 안된다.
그녀를 진정 사랑하는 것은 그녀를 포기하는 일이었다.
나는 어린 찻잎들을 싼 봉지를 그녀의 집 앞에 놓고 되돌아왔다.
가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며칠씩 집밖으로 나가지 않은 채, 벽난로 옆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를 잊는다는 것이 이렇게 가슴아플줄은 몰랐다.
창문 너머로 비가 내리고 낙엽이 떨어지고 첫눈이 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날,
눈 사이로 누군가 나의 통나무집을 찾고 있었다.
그녀였다.
난 서둘러 거울을 보고 헝크러진 머리를 가다듬고
애써 웃는 연습을 하며 문을 열었다.
"왠일이세요?"
"요즘 통 안보이시네요."
"예. 글을 좀 쓸게 있는데 출판사에서 자꾸 독촉하네요."
"네 저 내일 서울로 가요. 그동안 감사했다구요."
"감사는 제가 해야죠."
"네 그럼 저기요. 꼭 고백하세요."
"예?"
"그 여자분요, 엘리제."
"엘리제를 위하여 연습하시는거 보고 정말 좋아하면 저렇게 되는구나 생각했어요."
"꼭 고백하세요.!"
그녀가 떠나고 나도 서울로 돌아왔다.
이 도시 어딘가에 그녀가 살고 있을거라는 생각에
난 길모퉁이를 돌 때마다, 카페에 들어설 때마다, 엘레베이터에 문을 열 때마다
가슴이 내려앉곤 했다.
그녀를 닮은 뒷모습, 그녀를 닮은 비누향기만 스쳐도 가슴이 많이 아팠다.
겨울이 왔지만 난 여전히 가을속에 살고 있었다.
오늘은 서점에서 시집출간 사인회가 있는 날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렸고, 난 그저 성의없이 그자리에 앉아 있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이름이 모에요."
"이름이요. 이름을 알아야 사인을 해드릴 것 아니에요."
"피아노라고 하는데요."
"뚱~~~"
거짓말처럼 그녀가 서 있었다.
내 눈앞에 그녀가..
두 잔의 녹차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마주보고 있었다.
"여기. 서울에서 마시는 녹차는 맛이 틀려요. 그죠?"
"그럼요. 녹차는 새벽에 이슬에 맺혀 있을때,
그 어리고 연한 놈을 따다가 바싹 말려서 먹어야 되요. 그래야 제 맛이 나죠."
"네. 여전하시네요.."
"모가요?"
"손가락요."
그랬다.
나도 모르게 내 손가락은 무릎위에서 '엘리제를 위하여'를 치고 있었다.
그녀가 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간다면 난 아마 평생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바라는 사람이 내가 아니어도 좋다고,
기다려도 된다는 말 한마디만 해준다면.. 오랫동안 당신 뒤에서 기다리겠다고..
그렇게 여러가지 말들을 가슴속으로 연습하고 있었다.
그러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때였다.
"봉덕씨 봉덕씨가 바라는 사람이 제가 아니어도 괜찮아요."
"네?"
"좋아하는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거 잘 알아요..
그치만 나 기다려도 된다는 말 한 번만 해줄래요?
그럼 오랫동안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다른 사람만 봐도 내가 생각난다는 그녀
그래서 나를 찾아 서울 거리를 기약없이 헤맸다는 그녀
사랑은 어쩌면 이렇게도 엇갈릴 수 있는 것인지
나를 보며 기쁘게 웃는 그녀에게,
오랫동안 내 마음만 바라봤던 나를, 그녀 맘을 바라보지 못했던 나를
사과하고 싶다.
이젠 사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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