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신비.. -경 주-

2024. 6. 13. 00:31블로그 에세이/추억만들기

경주를 찾은건 막내아들 녀석이 돌때쯤 이었으니

거의 30여년 만의 일인것 같다..

그러나 그때는 휴가길에 가족끼리 부곡하와이를 가는길에 경주에 들러

박물관에만 갔다가 콘도에서 1박하고 떠났으니 이곳 불국사를 비롯한 관광지를

찾으것은 실로 고등학교때 수학여행으로 왔을때를 깃점으로

거의 40여년 이나 되지 않았을까 싶다..

평일이어서 인지 주차장은 그래도 여유가 있었다..

햇살에 눈이 부실만큼 하늘은 맑고 공활헸다..

 

 

 

 

 

건물은 옛모습 그대로 인것 같은데 주위의 사물들은 그대로 인지

기억이 잘나지 않는다..

이곳 앞마당에서 다른학교 학생들..

그리고 여학생들도 함께 섞여 지독히도 선생님 말씀 안듣던 기억이 새롭다..ㅋ

대웅전으로 통하는 백운교 청운교 아래는 여전히 수학여행의 기억이 머물러 있는곳..

엄동의 혹한에도 푸르름을 잃지않는 소나무의 높은곳에서 바람이 일렁이는 순간 싸늘한 한기가

사정없이 옷섶을 파고든다..

차가운 숲바람을 맞으며 수학여행 온 고딩의 마음으로 길을 나서자..ㅋ

 

 

 

 

 

 

 

 

지극히 화려하고 아름다운 다보탑..

역시 그모습 그대로다..

안타깝게도 다보탑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설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한후로  새로이 보수했지만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이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기단의 돌계단 위에 놓여있던 네 마리의 돌사자 가운데 3마리가 일제에 의해 약탈되어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아직까지 그 행방을 알 수가 없고

현재 1마리의 돌사자만 남아있다..

우리가 흔히 10원 짜리 동전에서 보아왔던 다보탑..

다보탑을 보면 동전과 화폐에 얽힌 김민지 괴담을 떠올리게 된다.. 

한국조폐공사 사장의 딸인 김민지 양이 납치당해 토막살인을 당했다는 

끔찍한 이야기..

조폐공사 사장은 딸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그녀의 흔적을 모든 동전과 모든 지폐의  곳곳에 남겼다..

10원짜리 동전의 다보탑을 기울여보면 탑을 받히고 있는 네 귀퉁이의 계단 모습이

"김" 자로 보이는게 대표적인 괴담의 시작이다..

50원짜리 동전의 보리 그림은 범행 도구로 쓰였던 낫의 모습이 나타나 있고

500원짜리의 이순신 장군의 수염 그림엔 고통스러워 하는 김민지 양의 얼굴이 보이며 

구권 1000원짜리엔 투호밑에 영어로 "min" 이란 글씨가 새겨져있다..

쓰다보니 불국사 여행 이야기의 본질에서 크게 벗어나 버렸다..

아무튼..ㅋ

 

 

 

 

간결하고 단순하지만 기품을 뽐내는 석가탑..

그림자가 없다는 일명 무영탑 으로도 잘알려져있다..

현존 하는 석탑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통일신라 시대의 석탑이며  국보 21호로 지정 되어 있고

석가여래상주설법탑을 줄여 석가탑 이라고 하며 최고의 미를 표현한 작품으로  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을 대표하는 가장 우수한 예로 손꼽힌다..

오랫동안 전해오는 설화에 따르면 불국사를 창건한 경덕왕때의 재상인 김대성은 절 안에

불탑을 세우기 위해 백제의 석공을 불렀는데 그중에서도 아사달이란 사람이 가장 솜씨가 좋았다고 한다..

아사달은 김대성의 요청을 받아들여 신라로 가서 석탑을 만들게 되었다..

그런데 아사달이 불탑을 만든다며 신라로 간 지 여러 해가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자 그의 아내인

아사녀는 남편을 만나기 위해 신라로 향했다..

어렵사리 불국사에 도착한 아사녀는 남편을 찾았지만 아직 불탑이 완성되지 않아

만날 수 없다며 사람들이 막아섰다..

당시 사람들은 불탑을 만들 때 여자를 만나면 상서롭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하는 아사녀를 가엾게 여긴 한 스님이 그녀에게 말했다..

불국사 가까이에 있는 연못에서 정성껏 기도를 드리면 탑이 완성되었을 때 탑의 그림자가

연못에 비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이후 아사녀는 매일매일 연못을 들여다보며 탑의 그림자가 비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림자는 볼 수 없었다..

기다림에 지쳐 상심한 아사녀는 결국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연못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그녀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사달이 석가탑 을 완성했다..

아내가 그리웠던 그는 서둘러 아사녀를 만나기 위해 나섰지만 아무리 헤매도 아내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홀로 백제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훗날 사람들은 아사녀가 빠져 죽은 연못을 "영지" ..

석가탑을 그림자가 없는 "무영탑" 이라고 불렀다..

 

 

 

 

 

 

 

토함산에서 내려다본 경주의 모습..

오백원 짜리 동전을 넣고 망원경을 이용해 보면 손에 잡힐듯 경주시내의 모습이

바로 눈앞에 와 머문다..

2월달이라 겨울의 한가운데 이긴 하지만 산꼭대기라서 인지 엄청난 바람에 체감온도가

곤두박질 친다..

 

 

 

 

 

 

석굴암으로 가는 길..

계단을 올라 산굽이 돌아가야 하는데..

수학여행 올때는 몰랐었는데 좀 멀게 느껴진다..

나이먹어 힘들어서 그런가..ㅋ

그때는 주변의 이런 모습이 아니었던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석굴암 석굴은 세계에서도 유일하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화강암 석굴이며 내부에서는

보존을 위해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근데 깜빡하고 한컷 찍고 말았다..아이구..ㅋ

창건 당시의 이름은 석불사였다..

국보 제24호이며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908년 "경주 토함산 꼭대기 동쪽에 큰 석불이 파묻혀 있다" 는  말이 퍼져나갔다..

우연히 이쪽에서 우편물을 배달을 하던 조선인 우체부의 귀에 들렸고 그는 이말을 전하기 시작했다..

이를 보고받은 경주의 일본인 우체국장은 군수와 부군수.. 그리고 고적 전문가와 함께

토함산에 올라 폐허가 된 석굴을 발견했다..

재상인 김대성에 의해 창건된지 1200년 만에 석굴암은 이렇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석굴암은 신라인의 믿음과 슬기로 만들어진 찬란한 문화의 금자탑 이다..

그것은 비단 미학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그러한 걸작을 이룩하게 된 신라인의 민족혼이

내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더욱 높이 보이게 한다..

 

 

 

 

 

 

성덕대왕 신종..

" 경덕왕이 아버지 성덕왕을 위해 큰종을 만들기 시작했다

   구리 12만근으로 종을 만들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혜공왕이 왕위에 올라 종 만들기를 이어갔다

    역시 여러번 시도 하였으나 번번히 실패했다

    정성이 부족함을 깨닫고 종의 완성을 기원하며 가난한 집에서 시주한

     어린아이를 넣어 주물을 하자 아름다운 종소리를 가진 종이 만들어졌다 "

우리에게 에밀레 종 으로 알려진 성덕대왕 신종 이다..

종을 제작할때 어린아이를 집어넣어 만들었는데 종을 칠때 "에밀레.." 라고 하는

소리가 마치 어미를 부르는 어린아이의 소리와 비슷하다고 하여 붙혀진 이름이다..

끔찍하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하다..

논란이 있자 전설임을 증명코자 종의 성분을 검사했고 그결과 사람의 뼈를 이루는

성분인 "인"이 검출되지 않았다고 안내문에 적혀있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어쩜 어린아이가 희생 되었을수도 있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종을 만드는데 필요한 구리 12만근이 국가의재정이 아닌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 해야 했다면

궁핍한 백성들 로서는 세금을 내기 위해 어린자녀들을 귀족의 노예로 팔기도 했을것이다..

결국 종을 만들기 위한 목적의 세금 이었다면 그종소리가 정말 아이가 에미를 부르는

소리로 들렸을지도 모를일이다..

 

 

 

 

 

 

 

 

경주 하면 떠올리게 되는 대표적인 문화재..

첨성대..

그때는 제법 커보였던걸로 기억하는데 이렇게 작았던가..하는

의구심이 갈 정도로 규모가 작아 보인다..

과연 이런곳에서 어떻게 천문을 관측 할수 있었단 말인가..

첨성대를 건축할때 들어간 돌의 갯수는 365개..

창문의 아래 위로 쌓아올린 돌의 층수는 각12단..

1년 365일과 12개월 24절기를 의미한다..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그시대에 돌하나 쌓는것도 이토록 의미를 두었었다는 사실이

세삼 놀라움을 자아내게 한다..

우리 수학여행때에는 저 첨성대에 모두 기어올라가 단체 사진을 찍기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학생들은 물론이고 당시의 문화재를 담당하는 관리들과

나랏일을 하는 공무원들의 무지함에 새삼 아연해 진다..

 

 

 

 

 

 

 

대릉원은 신라시대 고분 으로 가장 규모가 큰 고분군 이다..

신라 제13대 왕인 미추왕을 이곳 대릉에서 장사 지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미추왕은 김알지의 후예로 신라 최초의 김씨성의 왕이다..

20여기의 능이 이곳에 밀집되어 있으며 황남대총과 천마총이 이곳에 함께 자리 하고 있다..

입장료는 없었지만 폐관 시간이 다되어 서둘러서 둘러 보아야만 했다..

사랑 하는 사람과 아이들과 함께 천천히 아주 천천히 산책하듯 걸으면

참 좋을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안압지로 알고있는 이곳은 문화재청 으로부터 옛신라시대의 이름으로

명칭이 변경된 동궁과 월지다..

호수가 있는 동쪽의 별궁인 것이다..

커다란 연못을 파고 동궁을 지었으며 못가의 임해전에서 외국의 사신이나

나라의 중요한 일이 있을때 풍류와 연회를 즐기던 장소이다..

신라가 멸망 하기 직전에 서라벌을 방문한 고려의 왕건을 경순왕이 이곳에서

접대했다는 기록이 있다..

야경이 좋다고 해서 밤에 갔지만 정작 어두워서 화려한 조명 말고는 본것이 별로 없다는 그런..ㅋ

 

 

 

 

 

 

 

월지를 한바퀴 돌아보고 한컷...

밤이 되자 바람이 사나워졌고 날씨도 한층 더 추워졌다..

사진이 있는곳만을 위주로 설명을 올렸지만 이외에도 경주는 볼거리.. 먹거리..

즐길거리가 가득하다..

경주 국립 박물관..

교촌의 한옥마을..

보문단지..

경주빵의 시초인 황남빵..등등..

숨이 차서 다돌아보지 못할만큼 볼거리가 많은 경주는 분명 축복 받은 도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언제나 여행길에서 느끼는 점이지만 경주뿐만 아니라 어느곳이든 그저

벗꽂구경이나 단풍구경.. 풍악과 막걸리로 끝나는 그저그런 "놀러가기 " 에만

그치지 않는 의미있는 여행길 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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