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24. 00:44ㆍ블로그 에세이/낙 서
종로에서 친구들 모임을 마치고 들어가는 길에 혼자 명동을 찾았다..
명동은 내게도 아니 서울에 사는 사람들 이라면 아마도 때어놓을수 없는 장소 중에 한 곳 일것이다..
금방.. 추억이 따라왔다..
나 도 명동을 사.랑.했다..
박인환..김수영..이진섭..천상병..이봉구와 전혜린..나애심..
시인..작가..음악인들은 명동을 사랑했다..
저물 해 가 긴 그림자를 잡고 놓아주지 않을때 쯤이면 이들은 은성주점(최불암의 모친이 운영하던
막걸리집) 이거나 유명옥 (김수영의 모친이 운영하던 충무로의 빈대떡집)에 하나 둘 모여들어
막걸리 한사발에 시 와 노래를 읖조렸다..
명동은 아주 오래전 부터 문화 예술인들의 거리였다..
은성주점에 앉아 막걸리 한잔을 비울 단박의 시간에 써내려간 박인환의 시처럼 세월은 가고 오는것..
서산에 노을이 지듯 그들의 시 와 노래가 떠난 자리에는 다른 청년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쎄시봉..오비스 캐빈..금수강산..등이 문을 열면서 통기타 음악과 공연..청바지로 대변되는
젊은이들이 명동으로 몰려왔다..
대마초 사건을 시작으로 디스코 열풍이 불어닥치며 통기타 가수들도 새벽볔의 별 처럼 하나 둘 스러져 갔다..
국립극장의 남산 이전과 함께 문화 예술인들이 떠나갔지만 동인제 중심의
소극장들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삼일로 창고극장..엘칸토 소극장등 에서 자유롭고 실험적인 연극들이 탄생했다..
80년대 후반 군사정권하 에서 소극장들은 대학로로 대거 이전하였고(삼일로 창고극장은 지금도 예전의
백병원 뒷편 그자리에 그대로 있다..) 통기타와 음악다방은 종로와 무교동 으로 옮겨 가면서
타오르던 명동의 젊은 불꽃은 서서히 꺼져가기 시작했다..
시 와 문학..음악이 사라진 명동..
이윽고 명동성당 앞마당 에는 박종철..이한열의 대형 걸개그림이 드리워 졌고 민중미술과
민중음악 으로 명동은 80년대 저항문화의 한곳으로 자리잡게 된다..
언덕위 명동성당의 꼭대기 십자가 에는 낮은곳 으로 임 하시려는듯 예수님이
늘 같은 자세로 명동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화려하고 최첨단 디지털이 난무하는 명동거리의 언덕위엔 생명까지도 위협했던 억압의 시절 민중항쟁의
성지로 여겨지는 명동성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신부님의 강론 보다는 성가소리가 훨씬 더 성스러움을 느껴 알지만 참담한 시국에 뼈때리는
한마디의 강론은 가슴속에 울분을 만들게 했다..
명동성당 들머리 계단은 언제나 함성과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무자비하게 달려들던 백골단의 군화발도 성당 앞에서는 멈춰 섰고 페퍼포그차 에서 내뿜는
매케한 최루가스도 성당앞 에서는 삼가했다..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은 숨 막히게 쫒기다가도 연기에 질식해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라도
명동성당에 다다르면 안도의 한숨이 내쉬었다..
그래서인지 내 마음 속에는 지금도 명동성당을 오르는 구부러진 비탈길은 민주화의 성지로서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기억 으로 남아 있다..
이명박 정권의 4대강 사업이 한창이던 어느날..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이들을 저지하는 무리들 간의 실랑이가 벌어지며
신부와 신자들을 쫒아내려 했다..
성당의 사목회 신자들이 몰려와 신부님들께 항의하고 큰 소리를 치며 대들었다..
"나가라.. 여기는 내 집이다..
우리 집"이라고.."
어디선가 본듯한 모습..
십자가를 등에지고 가시 면류관에 피땀흘려 수난하던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치던 군중들이 떠올랐다..
"이곳 명동성당은 우리에게 느티나무 같은 곳입니다.
삶에 지쳐 힘들고 피곤해 기댈 곳 필요한 모든 이들에게
평화로운 쉼과 위로를 주는 곳입니다.
생명을 파괴하는 시대의 압제에 맞선 사람들이 모여들어
다시 희망을 품게 해준 그늘, 넉넉한 느티나무 였습니다.
지금은 빌딩 숲에 가로막혀있지만,
지난 시절, 이곳 명동 언덕에서도 생명의 강을 보았을 것입니다.
아이들이 뛰놀며 멱 감고,
해질 무렵이면 강들에 산산이 부서지는
석양의 아름다움을
분명히 명동성당은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 명동 생명평화미사 성명서 가운데..)
우리시대 신앙의 상징인 명동성당..
그곳의 현주소를 적나라 하게 보여주는 대목이지만 생명의 강을 위한..
생명을 지키기 위한 그들만의 힘겹고도 소중한 바램이었을 뿐 그들은 끝내 생명의 강을
지켜내지 못했다..
을지로 에서 명동으로 올라가는 언덕의 오른쪽 건물엔 지금은 휴대폰 매장이 들어서 있지만
예전에는 자장면집 이었던걸로 기억된다..ㅋ
명동성당의 맞은편 작은골목 끝엔 한국사회의 민주화에 커다란 기여를 했으며 또하나의
민주화 운동의 성지로 평가받고 있는 향린교회도 있었다..
진보 성향의 향린교회는 교회외벽에 "국가보안법 철폐" 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공안정국과 대치해 왔다..
2017년에 개봉된 영화 "1987"에서 재야인사 김정남(설경구 분)이 대공분실의 추적을 피해
숨어 들어간곳이 바로 이곳 향린교회 이다..
향린교회로 내려가는 좁은 골목길은 변함 없었지만 가게들이 바뀌어 옛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이제는 시위와 함성..최루가스가 사라진 명동..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른 노동자 들의 텐트도 이제는 없어진 명동..
내 기억속의 명동은 추억의 한 페이지로만 존제 할뿐 이젠 전혀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는 그거리는
낯설기만 해서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 거리게 했다..
로얄호텔 길 건너편 에선 가수로 데뷰 하기 전인 수와진이 날마다 심장병 어린이 돕기 길거리 공연을 했다..
그들은 언제나 가슴을 울리는 따뜻한 음악으로 거리의 사람들에게 행복과 희망을 전했다..
1985년 부터 시작해 2009년까지 24년 동안 가수로 데뷰 했음에도 이곳에서 계속 공연을 했으니
그들에게 명동은 지울수 없는 큰 흔적을 남긴 삶의 한 페이지가 되었을 것이다..^-
성당 앞에만 서면 속인을 감추지 못하는듯 한없이 작아지기만 했다..
뎅겅뎅겅 저녁 성종이 울리면 마치 큰죄를 지은듯 고개를 들지 못했다..
수없이 많은 날들이 흘러 이젠 육십이 넘은 나이가 되었지만 지금도 성당의 종소리가 들리면
깜짝깜짝 놀랄때가 있다..
어릴적 유아영세를 받고도 오래토록 냉담하며 살아온 탓인지 삶의 상실감에 후회 하거나
부정을 합리화 하려 하며 좌절과 분노로 일관된 삶을 사는 친구에게 한마디 위로의 말도
건네지 못하는 자신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남에게 용서받은 횟수 보다 용서해준 횟수가 더 적지 않은지..
남의 눈에 눈물 흘리게 하고 그 댓가로 나의 삶을 살찌우게 하지 않았는지..
내 자신에게 물어보는 삶의 화두에 자신있게 대답할 말이 없는건
아직도 나는 끝없이 많은 죄악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말 일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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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의 밤이 깊어져 간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 (민중가요) -이 산하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