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26. 00:41ㆍ블로그 에세이/추억만들기
시월의 하늘이 눈부시게 공활하다..
언제 이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을이 바짝 곁에 다가와 있었던걸까..
오늘과 내일이 교차되는 지점은 보이지않는 어둠속에서 이루어지기에 사람들은 태연할수 있는가보다..
주말오전..
조금은 이른시간 이어서인지 창덕궁 돈화문은 인적이 드물었지만 바로 옆길인 북촌으로 가는 길엔
그래도 사람들이 꽤많아 보였다..
데이트 하는 젊은이들과 외국인들의 모습이 가을햇살에 더욱 밝아보였다..
그런 북촌의 풍경을 한컷 담고 창덕궁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얼마전에 버스를 타고가다 창밖으로 보았던 비원으로 불렸던 그곳이다..
예전엔 매표소에서 표를 구입해 입장 할수 있었는데 지금은 출입구에서 카드단말기에 카드를 대면
자동결제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매표소가 아예 없어져 버렸다..
편하긴 하지만 누군가는 또 일자리를 잃어버렸을 것이다..
(창덕궁..
사적 제122호.. 창덕궁은 1405년 태종 때 건립된 조선왕조의 왕궁이다..
처음에는 법궁(法宮)인 경복궁에 이어 이궁(離宮)으로 창건 되었지만 이후 임금들이 창덕궁에
머무는 것을 선호 해왔고 특히 임진왜란 이후 법궁인 경복궁이 복구되지 못하면서 창덕궁은
고종 때까지 법궁의 기능을 하였다..
이처럼 오랜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사용되면서 다양하고 복잡한 왕실 생활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문화대백과 사전 에서-
괜찮다..
이렇게 조용하고.. 한가롭고.. 인적조차 드문 고요한 고궁은 내가 보고싶어 하던 모습이었다..
비가 오는 날의 그림같은 고궁의 풍경은 더욱 고즈넉하고 신비해 보이겠지만 햇살 가득한 이른시간의
한적한 모습도 괜찮아 보인다 ..
고궁은 언제나 마음을 정화하듯 심신을 평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늘 고궁엘 가고싶어하는 마음이 들게 했지만 사실은 마음만 있을뿐 쉽게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
마음을 열고 욕심껏 받아들인 가을햇살은 다시는 오지않을 오늘의 행복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었다..
저기 기둥이 있는곳에 모여 앉아 젊은 우리들은 열띤 토론을 참 많이 했었다..
"로테" 라는 여성을 만나면서부터 수면위로 떠오르게 되는 "베르테르"의 슬픔을 이야기 했고
"모짜르트"와 "살리에르"도 공부 했으며 봉사활동에 관한 준비와 문제점들도 심도있게 논의했다..
예수에겐 십자가가.. 소크라테스에겐 약사발이..링컨과 간디에겐 권총탄알이 그들에겐
차라리 훈장 이었음을 이해하게 됐다..
그때 열띤 토론을 이어갔던 그 젊은이들은 지금 흰서리 맞은 할배들이 되어있을 것이다..
편전이 아닌 이곳은 야외에 마련된 행사장으로 관리들은 자신의 품계에 맞는 위치에 서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가 뙤약볕에 쓰러지는 사람도 있지 않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우리가 학교 다닐적 조회시간에 운동장에 서있다가 뜨거운 햇볕으로 갑자기 쓰러지는
아이들이 있었던것 처럼..ㅋ
마이크도 없던 시절이었는데 저안에서 임금이 말하는 소리가 들리기나 했을까..
조선의 왕들은 모두 저 자리를 거쳐갔다..
수염을 쓰다듬으며 근엄하고 만인지상의 모습으로 앉아있지만 당파싸움과 당리당약에만 몰두하는
관리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나약했던 왕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지금도 다르지 않지만 우리의 역사에 조선의 역대왕들은 불우한 말년을 보낸 왕들이 적지않다..
그럼에도 저 자리에 앉으려는 암투가 끊이지 않았으니 현재에도 여전히 그 진흙탕 같은 싸움은
끊임없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아마도 그 싸움은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한 언제까지나 계속 될것이다..
궁궐의 처소 뒤뜰인것 같은데 사람이없는 한적한 틈을 이용해 과감하게도 사랑의 애정행각을
벌이는 녀석들이 있었다..
20대로 보이는 젊은한쌍이 진한 뽀뽀(?)타임을 갖다가 인적이 드문 자그마한 뒤뜰까지도
굳이 들어가본 나한테 그만 딱 걸린것이다..ㅋ
이마에 인상을 쓰고 째려보았던건 내가 더 민망했던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들은 내가 쳐다보는것쯤은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고 안하무인 인것 같아 조금은
씁쓸한 마음이 되고 말았다 ..
아무리 그래도 예절이란것이 있는데..
우리 아이들은 저러지 않으려나..
아궁이 인가보다..
그런데 지금도 불을지핀 그을음같은 흔적이 보인다..
조선시대에 흔적이 지금까지 저렇게 남아있지는 않을것 같은데 그렇다면 현재에도
불을 한번씩 지펴주는건 비 나 눈..습기같은 외부의 영향으로 목제로 지어진 건물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 아닐까 짐작 되었다..
같은 모양의 방이 일렬로 늘어서있다..
크지않은 규모의 작은방으로 보아서 무수리들이 쓰던 방이 아닐까..추측해 보지만..ㅋ
아님.. 뭐..말구..
드라마 "동이"를 볼때 이런곳으로 사람들이 피해다니던 장면을 본적이있다..
무슨 용도인지 길이라고 하기엔 높이가 너무낮아 허리를 반은 꺽은 상태로 힘들게 지나야 했다..
이길이 없었다면 건물을 둘러가야하니 이렇게라도 조금 빠른 지름길을 만들은걸까..
물이 잘빠지게끔 설치해 놓은 배수로다..
당시의 건축물들은 나름대로 모두 과학적 바탕을 근거로 건설되었다..
볕이 잘드는 남향의 건물과 정화시설까지 고려한 화장실..
배수로 역시 궁궐 전체에 물이 고이지 않고 일시에 빠져나갈수 있게금 과학적 설계가 뒷받침 되었다..
길게는 조선이 창업한 600여년전 부터 짧게는 불과 100여년 전에 이르기까지 그때의 사람들은 이같은
과학을 바탕으로 오늘과 같은 고도의 메카니즘 속에 살아가는 세상을 혹 예견이나 했을까..
드디어 창덕궁의 후원인 비원 입구다 ..
좌측으로보이는 나무로 만든 바리게이트 사이의 작은 출입구가 비원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왕들이 왕비와 함께 산책을 했던 비원은 예전부터 꼭 다시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도심 한가운데에 있지만 전혀 오염 되지않은 푸른 숲속의 산책로..
온갖 계절꽃들이 피어났고 머리위로 이름모를 새들이 푸드덕 거리며 함부로 날아 다녔다..
연못에 잉어들이 한가히 노닐었고 왕의 호탕한 웃음소리와 사라락 사라락 왕비의 비단치마
끌리는 소리가 들려오는것 같았다..
그러나 비원은 이제 예약제로 운영하기 대문에 미리 예약한 사람들만 입장이 가능했다..
아쉬웠다..
정작 가보고 싶었던곳은 비원 이었는데 갈수가 없었다..
할수없이 바로옆의 창경원으로 넘어가야 했다..
여기서 다시 카드로 천원을 결제해야 한다..
벗꽃하면 창경원이던 시절..
그옛날 어린시절에 부모님 손을 잡고 벗꽃구경 나섰던 이곳은 창경원 이다..
뽀얀먼지와 콩나물시루 같았던 인파속에서 겨우 귀퉁이에 자리를 잡으면 온식구들이 빙둘러앉아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함께 맛있게 먹었다..
아이스케끼와 칠성사이다는 나들이의 의미를 더해주었다..
회전목마와 줄에 매달려 빙글빙글 돌아가는 비행기 같은 놀이기구는 끝이 보이지않게
사람들의 행열로 긴줄이 만들어졌다..
봄날에 하얀눈이 내린듯 이곳은 온통 벗꽃세상 이었다..
그러나 사실 당시 창경원 벚꽃놀이는 바람직한 축제는 결코 아니었다..
일제가 우리 민족의 정통성을 무시하고 지우기 위해 왕이 집무하던 공간을 동물원으로
개조했으니 분노해도 부족할 부분이었다..
하지만 전후의 우리 국민들에게 창경원의 동물원이나 벗꽃놀이는 대단한 볼거리였다..
당시의 박정희 대통령도 불시에 시설점검을 나올정도 였다고 한다..
일제청산의 일환으로 그 북세통의 동물원은 서울대공원 으로 이사를 했고 벗꽃은 여의도로
모두 옮겨 심은후 지금은 이렇게 고즈넉한 고궁의 옛모습으로 우리곁에 돌아와 있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고등학교때 친구들과 밤벗꽃놀이 갔다가 그곳에서 만난 여학생들이 있었다..
그때 중앙여고와 서울여고에 다녔던 그 여학생들과 창경원의 밤거리를 거닐며 가슴 설레였던 기억이난다..
서로의 이름과 학교를 밝히고 나는 중앙여고에 다니는 이*미( 이름이 아직도 기억이 나네..ㅋ ) 라는
여학생에게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학교에서 중앙여고 까지는 버스를 한번 타야했다..
학교를 파하자마자 버스를 타고 중앙여고로 갔다..
학교앞에서 깜짝 놀랬다..
친구녀석 하나가 이미 중앙여고 정문앞에서 그 여학생을 기다리고 있는것 이었다..ㅋ
( 오..마이..갓..)
결국 그여학생은 누구도 선택하지 않았다..
된장..
이런 연못이 있었던것 같다..
옆의 안내판을 보니 이연못을 춘당지라 한다고 써있다..
연꽃은 아니더라도 같은 수생식물이 자생하고 있으니 그리 틀린말은 아닐것이다..
그때 아버지와 함께 나무로 만들어진 배를 탓었던 기억이난다..
가을이 깊어가면 연못가로 낙엽이 수북히 싸일것만 같다..
춘당지 옆엔 유난히 큰나무들이 많다..
능수버들의 잎파리가 물위에 닿을듯 가지가 무성하다..
잉어와 원앙도 많이 보인다..
연못가의 의자에 앉아 가만히 물멍에 빠져있어도 힐링이 될것만 같은 이고요함이 참 좋다..
겉으로 보기에도 웅장한것이 수령이 꽤나 될것 같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나무의 표면이 마치 자작나무처럼 흰색이다..
백송은 처음에는 역시 푸른색을 띠다가 나이를 먹으면서 사람들에게 검버섯이 피듯 차츰
흰얼룩무늬가 나타난다..
소나무 종류중에 하나인데 조선왕조때 사신으로간 관리들이 귀국할때 솔방울을
하나둘 가져와 심은것이 여기저기 퍼진것 이라고한다..
황매화가 이른가을 하늘아래서도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산수유도 보라빛 향기로 한낯의 더위와 오랜걸음에 지친 나를 유혹 하는듯
돌계단에 걸터앉아 걸음을 쉬게했다..
문득 얼마전에 읽은 김수영의 고궁을 나서면서..라는 시가 떠올랐다..
"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
너무나도 난해하기만한 싯귀에 시를 읽었다고 할수없을만큼 잠시 당황했지만 최소한 시인처럼
고뇌는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소심과 타락과 합리화와 타협에서 벗어날수 없는 모지리 인간이었지만
성찰은 하지 못해도 속물성에 번민은 해야할것 같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휴일을 고궁산책 하는것으로 정했지만 사색보다는 공상에 조금 더빠졌던 바람에
가끔 심란해 지기도 했었다..
내 천성이니 어쩔수 없다..
이른 가을의 한낯은 아직 해가 따갑지만 긴소매를 입어도 불편하지 않을만큼 바람이 일었다..
벌써 은행이 떨어진 거리를 사람들은 피해 가고있다..
하늘은 더 높아져만 가는데 갈수록 깊어질 가을이 버거워진다..
갑자기 배가 고파왔다..
그러고 보니 아침도 거른터 였다..
칼국수집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냥 국수집만 두군데가 보였다..
국수 먹으라는 계시 인가보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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