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화 11월에 내리는 비..

2024. 1. 12. 00:18음악이 흐르는../음악에세이

비가 오고 있다.
머그잔에 인스턴트 가루를 넣고 그 위에 뜨거운 물을 가득 붓는다.
뿌연 창문에 입김을 불어 소매로 쓱쓱 닦아내본다.

학교를 마친 아이들이 가방으로 머리를 감싼 채 추수가 끝난 들판을 가로질러 뛰어가고,
여름내 눈부신 초록으로 빛나던 나뭇잎들이 눈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잎새들을 촉촉하게 적시는 찬 빗물이 어느새 내 가슴 속 가장 아픈 기억을 슬며시 끄집어낸다.


그해 11월, 그날도 늦가을 찬비가 내리고 있었다.
난 따뜻한 방안에 엎드린 채 처마로 떨어지는 빗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아버지가 말했다.
새 어머니가 들어오기로 했다고, 그녀는 아버지가 가르치던 제자라고...
난 대답없이 처마에 떨어지는 빗물만 쳐다봤다.


얼마 후 그 녀가 왔다.
어머니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어린 그녀를 맞이하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나갔다.
그녀는 노란 우산을 쓰고 버스에서 내렸다.
한참을 두리번 거리는 그녀는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너무나 앳띠고 어린 모습이었다.
난 말없이 그녀를 앞서 걷기 시작했다.


"안녕 나는 영화라고 해.. 방가워"
"네"
"앞으로 우리 잘지냈으면 좋겠다."
"내년이면 고3이라고 하니깐. 내가 많이 도와줄께."
"그냥 얼굴만 안보이게 해주세요. 그게 도와주는 겁니다."
"어.. 그래?"

붉게 물든 그녀의 얼굴 빛 얼마후 그녀의 눈에서 반짝이는 눈물을 보았다.


그녀는 매일 새벽 나를 위해 도시락을 쌋고, 교복에 풀을 먹여 빳빳하게 다려주었다.
그녀 덕에 그의 운동화는 언제나 깨끗했고 학교에 타고 가는 자전거 역시 반짝였다.
그녀가 들려준 도시락을 들고, 풀을 먹여 다려준 교복을 입고, 깨끗이 빨아준 운동화를 신고,
윤이 나게 닦아준 자전거를 타고 난 푸른 안개가 자욱한 들판을 달렸다.
그녀는 내가 안개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한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단한번도 뒤돌아 보지 않았다.


그렇게 가을이 깊어가는 어느날 새벽이었다.
곤히 잠들어 있던 나는 마지막 한 목소리에 눈을 떳다.

"봉덕아. 봉덕아..."
"어 왜요?"
"저 것좀 봐봐"

그녀는 커텐을 젖히고 조용히 창문을 열었다.
밤새 내리던 비가 어느새 하얀 눈으로 변해 하늘 가득 휘날리고 있었다.
첫 눈이 였다.
새벽 눈 빛을 받으며 웃기던 그녀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봄이 왔고 난 고3이 됐다.
몸이 약했던 나는 자주 아펐다.
그녀는 내가 아픈것이 자기 탓이라도 되는양 어쩔줄 몰라하며,
내 뒤를 쫓아다녔다.
사골 국물에 밥을 말아들고, 쓴 한약이 담긴 흰 대접을 들고,
한약 먹은 후엔 알사탕 한 개를 들고... 부지런히 나의 뒤를 따라다녔다.
그러는 그녀가 고마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고맙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어느날 뜨거운 햇살아래 난 쓰려졌고, 입원하게 되었다.
누구보다도 가슴아퍼했던 것은 그녀였다.

시험도 대학진학도 밀어두고, 난 하얀침대 위에서 여름을 보내야 했다.
친구들이 병문안을 왔을 때 였다.
그녀를 보고 누가냐고 묻는 친구들에게 난 짧막하게 말을했다.

"음... 친척누나야"

그녀는 말없이 과일을 깍아 우리 앞에 내 놓고 밖으로 나갔다.
얼마 후 들어온 그녀의 눈자국에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희귀한 피를 가진 나 때문에 병원에선 늘 힘들어 했다.
난 걸핏하면 피가 부족해 중 환자실에 옮겨저야했다.
어느날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난 옆에서 그녀가 울고있는 걸 보았다.
이유모를 짜증이 밀어쳤다.

"울꺼면 나 안보는 되서 울어요"
"응...미안해 난...그냥"
"내가 니 엄마였다면 니 진짜 엄마였으면 좋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도 안되는데 그런 욕심이 생기네"

얼마 후 난 건강을 회복해 퇴원을 하게됐다.
병원을 나서는 날 난 알았다.
그 동안 내게 피를 주어 온 사람이 그녀였다는 걸.
푸른하늘을 바라보며 난 가슴이 먹먹해졌다.


다시 11월이 왔다.
노란 은행잎이 온 마을길을 환하게 덮어주고, 하늘 빛은 점점깊게 푸러가고 있었다.
낙엽 태우는 연기에 뒤덮인 마을은 가을 향기로 아름다웠다.
나는 시험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시험 보는 날 새벽
그녀는 종종거리며, 집안을 뛰어다녔다.
깊이 모락모락 나는 흰죽을 보온통에 담고, 맑게 우려낸 냉녹차를 물통에 담고,
무릎에 덮을 작은 담요를 곱게 접고, 보송보송하게 말린 털실내화를 가방에 담았다.

" 봉덕아 이따 내가 학교로 데리러갈께. "
" 혼자 가버리지 말고 학교에서 만나자 "
" 자 약속 "

그녀가 희고 가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순간 그 손을 잡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밖으로 나왔다.


시험이 끝났다. 비가 거세게 쏟아지고 있었다.
학교 현관은 시험을 끝낸 아이들과 우산을 들고 서성이는 학부모들로 북새통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모두들 그곳을 떠날 때까지 그녀는 오지 않았다.


비구름 사이로 나지막한 구름너머로 찬란한 무지개가 떠올랐다.
난 타박타박 걷기 시작했다.


그년 왜 오지 않았을까? 이 한 가지 생각으로 마을 어귀에 이르렀을 때,
난 비에 젖은 은행님 위로 살이 부러진 채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는 그녀의 노란 우산이 보였다.
처음 이 마을에 왔을 때 들고 왔던 바로 그 노란 우산이었다.

비에 젖어 있는 긴 머리, 창백한 얼굴, 그리고 그녀의 찬 손... .
서서히 식어가는 그녀의 작은 몸 위로 낙엽이 떨어지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급했을까? 달리는 차도 보지 못했던 걸까... ,
조금만 천천히 왔으면 좋았을걸.
꼭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무지개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11월은 마음이 깊어지는 계절이었다.
11월에 내리는 비는 마음 속 아픈 기억을 씻어준다고 했다.
그러나 이 계절에 내리는 비가 가늘고 흰 내 어린 어머니 미소까지 씻어줄 수 있을까.
그 찬 손을 잡아주지 못한 그 깊은 내 아쉬움까지 지워낼 수가 있을까.
소중한 빛까지 나눠준 그 고마움까지 지워낼 수가 있을까.


어느새 비가 괜 들판에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구름너머로 무지개가 다시 떠오르고 있었다.
무지개 위로 그녀의 얼굴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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