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화 그 여자네 집..

2023. 12. 26. 23:59음악이 흐르는../음악에세이

난 지금 그여자네 집앞에 서있다.
안개꽃 한다발을 들고서.
그리고 조그만 소리로 세레나데를 부르며...


나즈막한 담장 너머로 보이는 작은 정원
그 여자가 가꾸는 키작은 작은 꽃들
그 여자가 좋아하던 금잔디
가을볕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는 잔디위로
솜털같은 구름의 그림자가 살짝 드리워진다.
내가 그리던 풍경이다.
그녀에게 다시 오는 날,
꼭 이런 풍경속에서 그녀를 만나리라 생각했었다.


그녀를 처음 만난 날, 3월의 캠퍼스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노란 개나리는 환한 꽃망울울 터뜨렸고,
신입생들은 싱그러운 웃음을 맘껏 터뜨렸다.
들뜸과 설레임으로 가득찬 캠퍼스 한가운데에서, 나는 그녀를 처음 보았다.


그녀는 그림 동아리 선배였다.
컷트머리에 화장기 없는 맑은 얼굴..
물감이 뭍어있는 남색 앞치마를 두르고 활기차게 뛰어다니던 그녀..
난 그녀가 무조건 좋았다.


그러나 그녀는 내 사람이 될 수 없었다.
그녀에겐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기에 그들은 늘 함께였다.
밥을 먹을 때도, 그림을 그릴 때도, 집에 갈 때도 그때부터였다.
내가 그녀의 집앞을 서성이게 된 것은
새싹이 파릇파릇 돋아오르는 이른 봄이었다.


나는 꿈속을 헤매듯 그녀의 집앞을 걷고 또 걷고 있었다.
여름엔 줄기차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를 들으며,
가을엔 낙엽 떨어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난 그집앞을 떠날 줄 몰랐다.


함박눈이 내리는 어느 밤이었다.
며칠 째 학교에 얼굴을 보이지 않던 그녀를 보려고
난 그집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발이 얼어붙고 머리위로 눈이 소복소복 쌓일 때까지 그녀는 오지 않았다.


온 몸이 꽁꽁 얼어붙어버렸을 때야 하얀 눈위로 그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고 있었다.


"선배 괜찮아요? 어디서 술을 이렇게 먹었어요."
"누구야? 봉덕이야 너 여기 왠일이야?"
"그냥 요 앞 지나다가요. 선배 무슨 일있어요?"
"일 일 있지. 나 가슴이 너무 아파"
"봉덕아 너무 아파서 나 죽을 것 같아."

달빛에 비친 그녀의 창백한 얼굴위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누군가 그녀를 떠나버렸다는 것을 난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겨울이 깊어갈 때 쯤, 동아리에서 스케치 여행을 떠났다.
우리는 강원도 어느 작은 산사에 머물게 됐다.
난 우울해 하는 그녀의 기분을 달래보려고 애를 썼지만,
그녀는 말이 없었다. 조용한 산사처럼..


한밤중,
풍경소리에 잠이 깬 나는.. 눈위를 조용히 거닐고 있는 그녀를 보았다.


"선배, 모해요 감기들겠어요.. 잠 안자요?"
"봉덕아.. 이것봐.. 내가 눈 위에.. 그림그렸다."
그녀의 발자국은 하얀 눈위에 동그라미를 하나 그렸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에다가 그림 그리면 사랑이 이루어진데."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러나 슬퍼 보였다.


"선배"
"응?"
"난 안 될까?"
"뭐가?"
"나 절대 안되겠어요?"
"글세..뭐가?"
"나 선배 사랑하면 안되겠냐구요!"

그렇게 어설픈 고백을 한 후, 난 더 자주 그녀의 집을 찾아갔다.
그녀의 정원에 눈이 오고 새싹이 돋고 소나기가 쏟아지고 가을바람이 불었다.
시간이 얼마쯤 흐르고.. 난 군대에 가게 됐다.


군대에서도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만 생각했고,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를 썼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에게서 답장이 왔다.


"봉덕아, 니 편지 잘 읽고 있어.
곧 휴가라고? 나 보러 온댔지?
오지마 나 유학가거든.. 그림공부 더 하고 싶어서..
대신, 너 제대할 때쯤 돌아올께..
그때 우리 꼭 만나자.. 너 그때까지 힘내서 잘 살 수 있지?"


겨울이 두 번 지났다.
눈이 쌓일 때마다 난 주문을 외듯 눈 위에 발자국 그림을 그렸고,
동그란 그림 위에 소원을 실었다.
그녀와 사랑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난 지금 그녀의 집앞에 서 있다.
익숙한 그집앞, 익숙한 풍경속,
이제 그 풍경속으로 그녀를 초대할 일만 남아있다.


그렇게 들어와 보고 싶던 그녀의 집 안에 난 서있다.
그러나 이곳에 그녀는 없다.
그녀의 어머니가 전해준 편지 한 장만 날 기다리고 있었다.


"봉덕아, 미안해. 넌 나한테 속은 기분이지?
그땐 너한테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었어.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 정말 먼곳으로 가버렸거든.
미워할 수도 없게.. 몰래 찾아가 훔쳐볼 수도 없게..
금방 잊을 줄 알았는데.. 잘 안돼..
혹시 너도 나처럼 아프면 안돼잖아.
그래서 거짓말 한거야.
지금쯤은 너도 괜찮겠지?
언제나 우리집 앞을 서성이던 너..
널 잊지 않을께..'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그러나 난 알고 있다.
그녀는 사랑했던 그 사람을 찾아 떠난 것이다.
그러나 역시 난, 울지 않았다.

난 지금, 그녀의 방 창문앞에 서 있다.
그 여자가 서있었을 이곳에서 바깥을 본다.
낮은 울타리.. 누렇게 빛이 바래가는 금잔디..
그 위로 바람이 몰아가는 낙엽들..
그 여자네 집에 낯익은 풍경이다.
영원히.. 잊히지지 않을..

 

 

'음악이 흐르는.. > 음악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 6 화 슬픈미련..  (2) 2024.01.30
제 5 화 피아노  (0) 2024.01.26
제 4 화 이별여행  (0) 2024.01.19
제 3 화 11월에 내리는 비..  (0) 2024.01.12
제1화 바닷가 우체국  (1) 2022.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