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흐르는../음악에세이(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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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화 호수로 가는길
나를 위해 쌀을 씻고 나물을 무치던 아내, 셔츠를 다려주고 넥타이를 골라주던 아내, 그 아내를 잃어버린 나는 몹시 허둥대고 있다. 왜 사랑은 잃어버린 후에야 그 맨살을 드러내는지. 깊은 그리움과 아쉬움과 고마움을 왜 뒤늦게서야 가르쳐주는지. 사랑은 왜. 신문사의 공기는 언제나 후끈거렸다. 취재에 쫓겨, 특종에 쫓겨, 마감에 쫓겨, 난 언제나 숨쉴틈 없이 뛰고 있었다. 그런 내게 아내는 자주 전화를 걸어주었다. "네, 김봉덕입니다." "여보, 난데요." "어, 왜?" "나, 행운목을 하나 샀는데 글세, 꽃집 주인이 말이에요." "아 당신, 그 얘기 하려고.. 다른말 아니면 끊어!" 아내의 전화는 매번 이런식으로 끊어졌다. 언제나 새벽늦게 들어온 나를 아내는 지치지도 않고 기다려 주었다. 작은 소파위에 조그..
2024.02.07 -
제 7 화 소녀의 기도
그 마을로 돌아왔다. 10년 만에... 아직도 노을이 질 때면 밥 짓는 연기로 가득한 마을, 아직도 하루에 한 번 뿌연 연기속에 버스가 오고, 아직도 우체부가 올 시간마다 동구밖을 기웃거리는 머리 흰 할머니가 있는, 작고, 오래되고, 따뜻한 마을. 그 마을로 돌아왔다. 아직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련한 추억이 서린 마을. 아직도 떠올리면 가슴뛰는, 내가 사랑하던 소녀가 살던 마을. 그리고.. 내가 살던 마을. 그 소녀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과 그리고 아직도 풀리지 않은 그 소녀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이 마을로 돌아왔다. 까까머리 소년이었던 내가단발머리 소녀, 그녀를 만난 건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서였다. 그녀는 빨래를 널고 있었다. 늦가을 햇살이 마당가득 쏟아지고 있었고, 소녀는 검은 단발머리를 ..
2024.02.03 -
제 6 화 슬픈미련..
11월은 신비한 계절이다. 낙엽과 첫눈이, 가을과 겨울이, 사랑과 이별이 공존하므로.. 인디언들은 11월을 '눈빛이 깊어가는 계절'이라고 얘기했단다. 눈이 시리게 푸른 가을하늘보다 융단처럼 거리를 뒤덮은 색 고운 낙엽보다 더욱 아름다운 것은 11월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깊어진 눈빛이다. 가을에는 이별하지 말라고 했던가.. 그러나 첫사랑 그녀가 떠나간 계절, 가을이 되면 나는 한없이 헤매이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다. 헤어지자 말하던 그녀의 담담한 목소리와 그 뒷모습까지 너무나 생생하기 때문이다. 거리엔 그녀의 뒷모습을 닮은 여자들이 너무나 많았다. 긴 생머리만 봐도 아프게 내려앉는 가슴에 눈 둘곳 없어진 나는 발끝만 내려다보며 거리를 걷는다. 그녀를 잊기 위해 찾은 곳이 시련클럽이다.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2024.01.30 -
제 5 화 피아노
새벽에 서리가 내려서일까.. 녹차밭이 은빛으로 빛나고 있다. 따뜻한 스웨터라도 걸치고 산책을 나가볼까? 난 지금 아주 오랜만에 여유로운 휴식을 즐기고 있다. 지난 일년동안 난 한 권의 소설과 한 권의 시집을 완성했고, 그덕에 조그마한 차밭이 달린 통나무 집을 얻게 되었다. 은은한 통나무 냄새와 풋풋한 바람의 향기와 함께 이곳에서 오랜만에 진정한 삶의 여유를 느끼고 있었다. 한여름에 따온 어린 찻잎으로 끓인 녹차 한 잔, 그리고 이 아름다운 고요.. 이 아름다운 고요를 깨는 저 소리.. 내가 가장 싫어하는 피아노 소리.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작은 집, 분홍빛 커튼이 드리워진 창문 안에선 여전히 소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더이상 견딜수가 없었다. "누구세요?" "저 옆집인데요" "네 무슨 일이세요?" ..
2024.01.26 -
제 4 화 이별여행
창밖으로 아내가 정성들여 키우던 꽃 화분이 보인다. 파란 물조리개로 물을 부어주고 마른 헝겊으로 잎을 닦아주고, 꽃이 피면 달빛이 스러져 가는 줄도 모르고 밤새 그 곁을 지켜주던, 그 어린 화초들이 앙상하게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결국 아내가 이혼을 말한다. 이혼하자고 말해버렸다. 그가 나를 잡아주길 간절히 바라며 하지만 그는 말없이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창밖만 보고 있다. 푸른새벽이다. 도시가 아직 눈뜨지 않은시각 우리가 자주가는 제과점 아직도 우리옷이 걸려있을 수 있는 새탁소, 아내얼굴을 떠 올리며 사곤했던 과일가게 모두 굳게 셔터를 내려버렸다. 왜 아내는 이 시간에 여행을 떠나자고 했을까? 그와 마지막으로 여행을 떠나보고 싶었다. 아직 사랑한다는 말도, 그를 놓아주고 싶지 않다는 말도 아무말도 해주지..
2024.01.19 -
제 3 화 11월에 내리는 비..
비가 오고 있다. 머그잔에 인스턴트 가루를 넣고 그 위에 뜨거운 물을 가득 붓는다. 뿌연 창문에 입김을 불어 소매로 쓱쓱 닦아내본다. 학교를 마친 아이들이 가방으로 머리를 감싼 채 추수가 끝난 들판을 가로질러 뛰어가고, 여름내 눈부신 초록으로 빛나던 나뭇잎들이 눈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잎새들을 촉촉하게 적시는 찬 빗물이 어느새 내 가슴 속 가장 아픈 기억을 슬며시 끄집어낸다. 그해 11월, 그날도 늦가을 찬비가 내리고 있었다. 난 따뜻한 방안에 엎드린 채 처마로 떨어지는 빗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아버지가 말했다. 새 어머니가 들어오기로 했다고, 그녀는 아버지가 가르치던 제자라고... 난 대답없이 처마에 떨어지는 빗물만 쳐다봤다. 얼마 후 그 녀가 왔다. 어머니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어린 그녀를 맞이하..
2024.01.12